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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욕의왕 Dec 10. 2015

도피 독서

우리는 인간이니까 하루키 속으로 그냥 들어가는거야

수능 시험 전날, 그러니까 10년전(어머나) 나는 책상에 앉아 홍성대 저 ‘수학의 정석’을 읽고 있었다. 나는 수학을 유독 못푸는 학생이었다. 내가 수학을 포기하게 된 것은 삼각함수 때문이었다. 사인, 코사인, 탄젠트. 삼각형의 빗변이 만들어내는 오묘한 원리를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라는 인간이 무언가를 이해하는 메커니즘은 왜? 라는 질문과 그것에 대한 합당한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인데, 삼각함수는 이유도, 근거도 불충분했다. 그 후로 나는 수학 시간에 멍하니 앉아있는 ‘학생 1’이 되었다.

누군가가 공부한 수학의 정석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치열함이 페이지에 베여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점차 옅어져서 후반부에는 흔적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흔적없이 산뜻한 삼각함수 페이지를 펼쳐놓고 좌표평면 위 각 사분면에 사인, 코사인, 탄젠트를 적어두고 한참을 쳐다봤다. 수능 전날 밤에.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싶은 생각이 명치를 갑갑하게 압박했다. 그 다음 내가 한 행동은 지금의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짓이었다. 책장에 꽂힌 '상실의 시대'를 꺼내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 읽기 시작한 것이다. 미도리의 집 옥상에서 술을 마시면서 이웃에서 불이 난 광경을 지켜보는 장면부터 시작해, 와타나베가 빈 공중전화 박스에 덩그러니 서있는 마지막 장면까지 다 읽고 나니 시간은 1시였다. 다음날 몽롱한 정신으로 시험을 봤는데, 삼각함수 문제는 안나왔던가 아니면 시간이 없어서 손을 못댔던가. 아무튼 난 수학이랑 상관 없는 대학에 갔다.

그것이 첫 번째 도피 독서의 기억이다. 오늘도 이런 저런 공부를 하다말고 명치가 답답해져서 하루종일 책을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는데 문득 수능 전날 밤이 생각났다. 게으른 나와는 달리 하루키는 매일 달리기를 하고, 글을 쓴다. ’매일 쓰고, 매일 뛴다.’ 심플한 이야기지만 직접 시도해보면 이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 알 것이다. 매일 쓰고 매일 뛴 덕분일까. 하루키는 환갑이 넘었는데, 여전히 세련된 글을 쓴다.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한결같다. 마치 무인 양품 카탈로그에서 걸어나온 것 같은 사람들이 섹스를 하고, 폭스바겐이나 사브의 자동차를 타고, 폴로에서 나온 셔츠를 입는다. 그런 디테일은 특유의 정서를 만드는데, 쿨함이 최고의 미덕이던 때, 출판시장에서 하루키의 힘도 가장 강했다. 분명 어떤 시대상을 상정해놓고 쓰는데도 그 시대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글. 누군가는 이를 하루키를 저평가하는 이유로 삼기도 하는데, 반대로 그것이 하루키가 위대한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도망치고 싶을 때, 하루키 소설이 더 잘 읽히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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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체절명의 꿩은 머리만 풀에 감춘다죠? 우리는 인간이니까 하루키 속으로 그냥 들어가는거야

(문성근)



1. 여자 없는 남자들 - 무라카미 하루키 씀/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인세 지불/ 교보문고에서 12,420원으로 살 수 있다 우리는/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54625586&orderClick=LAH&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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