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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욕의왕 Dec 08. 2015

너는 몰라. x도 몰라.

나는 화장을 확인하는 게 아냐 인생을 확인하는 거지.

'그래. 드디어 알았어. 아니, 이제야 알았네.'

한마디 했어요. 아니 두 마디, 세 마디나 했네요.


아주 지긋지긋하게 불편함과 불안함을 유발했던 저놈의 세 치 혀. 더 이상은 못 참겠어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어요. 화장을 고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이를 닦으러 가는 것도 아니에요. 제가 앉았던 빈자리와 서 있는 저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는 저 어리둥절한 표정이라니.

그러니까 저놈은 아주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를 견지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는 놈이었어요. 뭐라고 하더라. 그렇지. PC! 항상 편견 없이 배운 대로 행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온몸에 가득 찬 아이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할 때마다 어떤 위화감이 공기를 뒤덮었어요. 하고 싶은 말은 꼭 해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르는 그 입술. 그 혀. 확신에 찬 그 눈. 불편한 그 분위기에서 도망치는 방법은 파우치를 들고 화장실에 가는 것이었어요. 물론, 지금은 지하철 타러 가고 있어요.

 이름있는 학교를 나왔지만 그렇다고 그곳에서 잘 배운 것 같지는 않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을까요? 고작 백몇 글자의 트윗을 읽고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봤는데 언제부터인가 뭘 그렇게 보느냐고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어요. 어차피 진지한 얼굴로 안경을 올려 쓰고는 설명하려 들 게 뻔했으니까요. 그 시간에 안경이나 좀 닦았으면 좋겠는데, 기름 낀 안경알이 그 아이의 눈을 종종 가렸어요.

그래서일까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이는 건 안 보는 그 태도 말이죠. 선거는 항상 2번을 찍고 신문은 겨레의 경향을 읽으며 티브이 뉴스는 그래도 손석희 아저씨 것을 봐야 한다고 말하지만, 손석희 아저씨가 서울대를 못 나와서 저렇게 열심히 파고드는 거라고 얘기할 때 조금은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네, 제 잘못이죠.

'가정교육을 잘못 받아서 그래'

PC를 견지하고자 하는 그 아이의 결연한 의지는 느닷없는 타이밍에 허망한 실체를 드러내곤 했어요. 그 남자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 - 행동을 보고 '왜 저럴까?' 묻고 답하는 자문자답의 시나리오 - 은 남자는 '가정교육', 여자는 '못생겨서' 혹은 '예뻐서'가 세상의 진리인 양 등장했으니까요.

어떤 사람의 잘못과 실수가 결국 잘못된 가정교육으로 귀결되는 아주 투명하고도 얕은 그의 논리는 둘째치고 그의 행동에는 기본적으로 일관성이 없었어요. 당연하게도 엄격한 공중도덕 관념을 지닌 척했던 그의 첫 모습은 점점 흐려져 그가 '가정교육' 운운할 때마다 '너희 아버지는 도대체 뭐하시는 분이니?' 하고 묻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요.

'카페 알바 바뀌었나 봐? 엄청 친절하네.'

'응. 근데 저 애가 왜 저렇게 친절하게 된 건지 알아? 야 근데 몸이 어떻게 저렇게 두꺼울 수가 있어 사실상 씨름선수지. 이태현이 알아? 이태현이 씨름선수. 똑같아. 아무튼, 쟤는 저래서 친절하게 된 거지 그리고 친절한 애들이 일은 잘하니까 또 사장은 안 뽑을 수가 없고 참 어쨌든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야.'

저는 이태현이가 누군지는 정말 하나도 관심 없지만, 친절한 카페 알바가 갑자기 씨름선수 이태현의 동생이 되어 못생겼기 때문에 친절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그의 '솔직한' 발언에는 정말 하나도 동의할 수 없었어요. 교오양 있는 시민이라면 팬티를 함부로 내려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그건 손석희 아저씨 뉴스를 안 봐도 알 수 있는 건데 쟤가 서울대를 못 나와서 그런 걸까요. 아님 가정 교육을 잘못 받은 걸까요.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그의 솔직함의 향연에 맞서는 저의 유일한 저항은 고작 침묵이었는데, 수많은 침묵의 순간에 내가 향했던 곳이 고작 화장실이었다는 사실이 저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어요. 퍼프를 들어 얼굴에 두드리는 화장실의 시간이. 솔직함의 친구가 되어주었을 침묵과 부재의 시간이.

'그래. 드디어 알겠다. 아주 잘 알겠다.'

존재가 참을 수 없어질 때 어떤 희망이 존재할 수 있겠어요. 인류애가 부족한 사람과 어떻게 연대를 하고 어떤 공감을 바랄 수 있겠어요. 잘 배우고 못 배우고 예쁘고 안 예쁜 사람만 사는 그의 세상에서 나의 존재는 도대체 어디쯤 있었을까요?

'위선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평소 그의 지론이 사실은 입김 한 번에 쓱 닦여질 안경알의 기름때 보다도 못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 제가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어요. 저는 그 아이의 엄마가 아니니까요.

가정 교육이 부족한 그에게 적당한 사회화 교육 방법은 이별의 몽둥이를 힘껏 날리는 것. 그래서 한 번쯤은 자기 자신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것으로 정했어요. 노란색 아이콘에 붉게 표시된 10이라는 숫자에 무슨 말이 담겼는지는 '솔직히' 하나도 궁금하지 않거든요. 정말이지 '솔직히'는 이럴 때나 쓰는 말이잖아요. 나쁜 새끼.

그래도 테이블 위에 커피는 가져올걸. 무의미한 퍼프의 시간을 만회하는 마음으로 화장실에 잠시 들러서 화장이나 다시 확인해보려고요. 없는 게 없는 제 메이크업 백으로 시원하게 한 대 날리고 올 걸 후회도 되지만 폭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안 되는 거라고 엄마한테 배웠으니까요. 대신 뚜렷한 아이라인이 붉은색 틴트가 제 얼굴을 속 시원하게 만들어 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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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크업하기도 부족한 시간. 내가 울지 않는 건 억울하지 않아서가 아니야 내 마스카라가 비싸기 때문이지. 너랑 헤어지는 것보다 내 메이크업 파우치를 잃어버리는 게 솔직히 더 비극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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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도움이 되는 세포라 메이크업 백!
나는 화장을 확인하는 게 아냐 인생을 확인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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