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먹은 것 말고는 한 게 없네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가 지나갔습니다. 조금은 기념비적인 크리스마스라는 생각이 들어, 저는 냉철한 1인칭 화자가 되어 이틀 동안 있었던 일을 그대로 기술하려고 합니다. 크게 의미부여 하지 않으려 했지만, ‘의미부여 하지 않겠다’는 의식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은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조성진 콩쿠르 실황을 BGM 삼아 자판을 두드리는 지금 이 순간의 괴로운 심정까지도요.
12월 25일.
오후 4시 40분 CGV 아트레온에서 상영하는 ‘이웃집에 신이 산다’를 예매했습니다. 한껏 늑장을 부린 저는 4시 30분이 되어서야 세브란스 병원 앞에 내렸습니다. 날씨는 그렇게 춥지 않았습니다. 신촌 상권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해도, 역시 날이 날인 만큼 인파가 북적거렸습니다. 숏컷으로 가기 위해 모텔촌 앞을 지나는데 싸우는 커플이 세 쌍 정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받고 있을 고통을 동정하며 영화관에 도착했습니다.
친구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9관으로 들어갔습니다. 저희 자리는 분명히 A11, A12였는데 한 커플이 A10, A11에 앉아있었습니다. 공중도덕이나 약속보다는 함께 앉고 싶은 그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바, 말없이 A11 자리를 내주고 비어있는 나머지 두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커플이 들어와 혹시 여기 자리 맞으시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A11, A12가 맞는데 …
저는 A11, A12를 예매했습니다. 문제는 12월 26일의 A11, A12를 예매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미안했습니다. 하지만 굳이 사과를 해야 하는지 좀 헷갈렸습니다. 홍대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어이없이 웃고 있는 사람이 여자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지 생각했습니다. 아까 모텔 앞에서 싸우던 커플들도 날짜를 착각했을까요. 그건 아니겠지요.
다행히 상상마당에서 ‘바닷마을 다이어리’ 마지막 두 자리를 예매할 수 있었습니다. 남자와 영화를 보겠다고 이렇게 먼 거리를 이동하며 마음을 졸여야 하나 싶었지만,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어쨌든 오늘은 즐거운 연휴의 첫 날이니까. 극장에 들어갔는데 하필 저희가 예매한 두 자리만 가운데 팔걸이가 없었습니다. 친구가 ‘씨발, 하필 여기만 붙은 자리네. ’라고 읊조렸습니다.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상상마당에서 가운데 팔걸이가 없는 자리를 원하시는 분은 A1, A2를 예매하시면 됩니다. 77개 좌석 중에서 단 2개뿐인 팔걸이 없는 자리입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언뜻 혈연 간의 애틋함과 일본 어촌 마을의 풍광을 그린 영화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실 아버지를 잘못 만난 네 자매의 연애관이 얼마나 뒤틀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네 자매는 우유부단한 아버지를 보며 자란 탓에, 보기 드문 미인임에도 남자 고르는 안목이 없어 박복함으로 스스로를 몰아 넣고 있었습니다. 친구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지금까지 만났던 그녀들과 그녀들의 엄격한 아버지들을 떠올렸습니다.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12월 26일.
등이 너무 뜨거워서 일어나보니 전기장판 위였습니다. 기분이 좋진 않았습니다. 뒤늦게 일어난 친구와 NBA를 보며 어제와 식감이 사뭇 달라진 몬스터피자를 감흥 없이 씹어 삼켰습니다. VOD 다운로드로 ‘응답하라 1988’을 보며 쑥맥 같은 개정팔을 함께 욕했습니다. 개정팔이 머뭇거리는 동안 덕선… 아니 수연이의 큰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개정팔 나쁜 새끼. 개정팔의 사려깊음은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라멘트럭에 가서 차슈 추가 라멘을 먹었습니다. 맞은편 커먼커피에는 미인 알바생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주말 오후에 일하는 그녀 덕에, 오늘이 토요일임을 깨달았습니다. 커피를 마시지 않을 이유가 특별히 없었습니다. 그녀가 아메리카노를 건네러 다가왔을 때, 감지 않은 내 머리에서 나는 냄새가 느껴졌습니다. 카페 아르바이트생에게는 어떤 식으로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것이 자연스러운지 서로 토의하며 집으로 다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둘 중 누구도 커먼커피 미인 알바생에게 번호를 물어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요. 어쨌든 개정팔은 나쁜 새끼 입니다.
세 시간 간격으로 친구는 ‘유쾌한 연휴 아니냐?’라고 물었습니다. 응. 유쾌한 연휴는 맞는데 제발 그렇게 말하는 거 그만두면 안되냐? 짜증을 내고 말았습니다. 친구가 별 의도 없이 유쾌한 연휴임을 확인하려 그 말을 내뱉을 때 허공에 흩어지는 소리의 파동처럼 유쾌함이 흩어져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일어나기 3/12회.'
애플워치가 제가 오늘 단 세 번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려줬습니다. 좋은 세상입니다. 기적적으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습니다. 림가기에서 오리쌀국수를 먹고 힙스터들이 가는 테일러카페에 갔는데 자리가 없었습니다. 카멜색 롱코트를 입은 남자에게만 자리를 내주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자리에 앉아있는 그들의 롱코트 자락이 바닥에 닿을락 말락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근처 커피랩에는 다행히 자리가 있었습니다. 앉아서 여자 이야기를 하다 미인이 들어오면 대화는 두절되었고 서로 눈빛으로 ‘방금 봤어? ’를 말한 뒤 머쓱하게 웃었습니다. 너무 병신 같았습니다. 여자에게 경외심을 가져야겠다는 것이 대화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늘 이맘때 그녀들이 곁에 있어주었기에 우리는 안온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득 그녀들의 안부가 궁금해집니다. 오늘은 아이폰을 머리맡에서 멀찌감치 떼어놓고 잠을 청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