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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욕의왕 Dec 01. 2015

가끔 이룰 수 있는 꿈

조선희의 열정과 불안 그리고 우영미

고등학생 때 조선희가 쓴 '열정과 불안'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이 대화하다가 ‘돈을 도대체 얼마나 벌면 만족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서로 답을 주고받는 그런 장면이 나오는데, 그중 한 명이 백화점에 들어가서 ‘엘르’나 ‘베네통’에서 가격표 안 보고 물건 계산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사고 싶은 거 가격표 안 보고 산다.’ 이 단순한 한 문장에 숨겨진 복잡한 사회경제적 맥락의 층위들은 뒤로한 채 저는 그 솔직하고 명확한 대목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니까 ‘엘르와 베네통’ 자리에 저는 ‘솔리드 옴므와 우영미’를 집어놓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소비자의 꿈으로 저 문장을 떠받들었습니다. 좌우명을 정하고 가훈을 정하듯 저에게는 완벽한 소비자의 본령을 그리는 기준이었던 셈이죠.

날렵한 선들이 교차하는 코트와 셔츠와 날카로운 바짓단에 온전히 빠질 수 있는 여유는 가격표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아야 가능하니까요. 구매 능력은 물신 경외의 필요조건입니다.

우영미를 ‘마음대로’ 사는 것은 여전히 이루지 못한 꿈입니다. 이루려면 이룰 수 있는 꿈이란 더는 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꿈은 밤하늘에 빛나는 저 별처럼 반짝반짝해서 ‘저 별을 따다 주마.’ 하는 낡은 말처럼 들려야 멋있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으니까요.

하지만 카드명세서에 우영미의 이름이 빛날 때 치열한 삶의 가치가 더 높아진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 치열함과는 상관없이 고고하게 절제된 우영미의 선과 우아한 검은색에 제 모든 것을 바치고 싶습니다. 가끔 이룰 수 있는 꿈이 있다면 그래도 나쁘지 않은 삶 아닐까요? 저 별은 딸 수 없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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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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