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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GWORK STUDIO Nov 29. 2022

아빠 찾아 삼만리_프롤로그

2022 서울문화재단 시민예술대학



프롤로그


2022년 <아빠 찾아 삼만리> 프로젝트는 지금은 폐관된 서울문화재단 관악 어린이 창작놀이터에서 진행되었던 ‘예술로 부모 플러스’ 프로젝트의 연장선에서 시작되었다. 2018년~2021년까지 예술가들은 아버지와 자녀와 함께 예술의 언어로 만나는 워크숍을 기획하고 진행하며 서로에 대해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 사이 발생한 팬데믹 상황은 예기치 않게 장기화되면서 문화예술 콘텐츠를 생산하는 기획자 입장에서 예술과 만남의 방식에 대해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존에 프로그램 위주로 진행하던 예술교육 워크숍 방식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예술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생산물과 결과물에 집착하는 방식에 대해 의문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자녀와 함께하는 아빠 대상의 예술교육 워크숍을 모집하면 열중 아홉은 엄마가 신청을 하였다. 주말 아침, 아버지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주중에 자녀와 함께 하지 못했다는 부채 의식과 아내의 기대에 떠 밀려와 워크숍 장소에 힘겹게 착륙하는 아버지들은 대부분 착하고 성실한 분들이었다. 그 무거운 어깨에 예술교육이라는 짐을 하나 더 얹혀 드린 셈이었다. 자녀를 위해, 가족의 기대를 위해 휴일을 반납하고 열심히 노력하시는 아버지들을 보면서 감사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무언가 진짜 이야기를 만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그분들의 속 마음을 듣기에는 워크숍 시간은 너무 짧았고 그저 즐거워하는 자녀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으시곤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결국 아무런 사건도 발생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빠’라는 단어의 실체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와 국가공동체는 아버지라는 단어에 어떤 공통된 규범을 기대하고 있다. 시민예술교육 워크숍에 나오신 아버지들은 그 규범의 기준점에 최대한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계셨다. 하지만 정말 그것이 아버지의 실체일까?


아버지들은 아버지이기 전에 한 사람의 개별적인 주체이다. 개별적인 주체들은 저마다의 삶의 방식과 가치를 가지고 있고 어쩌면 아버지라는 단어를 제외하곤 공통점이 거의 없는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규범을 공유하지 않은 타자들끼리 서로 말을 걸고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공동체적 합의가 무너진 시대 가장 필요한 예술적 행위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나를 포함한 우리는 중년의 남자들이다. 거기다 결혼한 지 십여 년 정도 되었고 미취학, 취학 자녀들도 있다. 생각도 고집도 제 각각이고 사는 방식, 지위, 경험, 습관도 모두 다 다른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을 뭉뚱그려서 ‘아버지’는 이러한 거야. 좋은 아빠는 이런 것이야 라고 떠들어 대는 강의를 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모였는데 아버지의 실체에 접근할 수 없는 역설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다양한 아버지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일부러 기존의 고정된 아버지 상에서 빗겨나가 있는 아버지들을 찾기 시작하였다. 사실 고정된-비 고정된 개념 자체의 구분이 우습긴 하지만 다만 주체성을 가지고 기존의 사회적 통념과 다른 삶의 방식을 살기 위해 모색 중이거나 잠시 멈추어 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들을 찾아 대화하고자 하였다.


사회와 처가댁은 대체로 이러한 종류의 성인 남성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가 줄줄이 달려있는데 멈추다니? 다른 길을 모색하다니? 나다운 삶을 찾기 위해 연봉 높은 직장을 그만두다니? 제정신인가? 아빠가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될까?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쩌면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란 영화를 보면 주인공 아이는 거의 백수 같은 인디 뮤지션인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엄마와 재결합하라고 채근을 한다. 그러자 아빠는 “나는 네가 더 큰 일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 예를 들면 음악이라든가 세계라든가...”라며 다소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한다. 또 인디음악이 뭐냐는 아들의 질문에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음악’이라고 답변을 해준다.


어쩌면 아빠는 고정된 기능과 역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존재적으로 아이와 관계를 맺고 어떤 씨앗을 ‘툭’ 던져주는 사람이 아닐까? 사회적 기능으로 치자면 많이 부족할 수도 있고 무언가 빠져 보일 수 있는 사람이지만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길을 찾으며 사회 속에서 작은 움직임과 희망 같은 것들을 만들어 가는, 그래서 세상이 조금은 살만한 곳이구나 하는 느낌을 조금씩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까? 그리고 아이들은 그 씨앗을 가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아버지라는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우발적인 대화를 시도하였다. 대화 속에서 서로를 발견하고 새로운 만남과 사건들이 발생하기를 기대하였다.

한창 육아로 혹은 자신의 일로 바쁘고 지친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맨 정신으로 중년의 남성들이 밤마다 몇 시간씩 대화를 나누었다. 이 자체가 매우 기이한 풍경이었다.


곳곳에 꼭꼭 숨어 있어서 아직까지 새로운 종으로서 아빠들은 많이 발견되진 않았지만 우리가 만난 아빠들은 새롭게 재생산되고 있었다. 기존의 관습적인 역할과 기대를 벗고 자신의 삶의 방식을 새롭게 찾아가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주부(主婦)의 정의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았다.

사전적 의미로는 일반적으로 한 집안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 가는 안주인을 가리키며, 가정신앙과 관련해 의례를 주관하고 직접 의례 수행자가 되는 한 집안의 핵심 여성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한국 민속 대백과사전)


의식과 의례용 음식을 준비하고 한 집안의 살림살이를 꾸려가는 일. 조선 유교사회에서 주로 여성의 일이었다고 하지만 좀 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주로 사제나 신전의 제사장이 집전하던 일임을 알 수 있다. 성별 역할이 아닌 한 집안의 집례와 의식 그리고 경영을 책임지는 역할이 주부의 일인 것이다.


현대산업사회에 이르러 주부의 신성한(sacred) 의미는 사라지고 국가 산업을 창출하는 가장을 보조하는 상대적인 기능만 남아버렸다. 그래서 더 이상 주부에서 어떠한 의미나 보람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주방은 한 번도 요리한 적 없어 보이는 인테리어 사진용이 공간이거나 ‘부엌데기‘의 버려진 공간이 되었고 집안일은 집례나 신성의 의미와 전혀 상관없고 자동화시키거나 배달음식 따위로 회피해야 할 레지스트리화 되었다. 심지어 요리하는 남자도 산업적 고부가가치로 성공시킬 때에만 그 지위를 인정해 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집안에서 ‘주부를 하는 아빠’라는 타이틀은 스스로 위축되고 움츠러들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등 한 의미로 전락된 주부(主婦)의 의미를 재전유(appropriation)하고 주체적으로 탈환하는 아빠들도 있었다.


육아를 스스로 고객만족 서비스로 칭하고 영업전략을 끊임없이 연구하는 아빠, 자신의 육아일기를     인스타툰으로 그려 매주 꾸준히 올리는 아빠, 엄마들로 둘러싸인 근린과 지역사회 안에서 아빠로서 역할을 주체적으로 찾고 학교 폭력 문제와 어린이  권리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하려는 아빠, 동네 살롱에서 음악회를 열고 연주를 하는 뮤지션 아빠, 시골에 휴직하고 머무르며 코로나 기간 육아하는 아빠들의 대화와 글쓰기 모임을 기획하고 모색하는 아빠. 대기업을 휴직하고 아이와 다른 삶의 공간과 시간을 갖고자 이주를 결심하고 주체적인 삶을 새롭게 모색하는 아빠! 이런 멋진 아빠들과 대화는 부가가치세로  환원될  없는 법이다.


우리는 아빠에 대한 정의를 정량적으로 판단 내리기를 멈추고 유보해야 한다.

아니 사실 세상에 대부분의 의미 있고 예술적인 일들은 대부분 정량적인 판단 내리기를 멈추고 유보해야 한다. 불확실함을 견디는 것. 모호함을 견디고 그 긴장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파도를 타는 것. 이것이 대부분의 창의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2022년 아빠 찾아 삼만리 기획자_ 최형욱(시각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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