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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GWORK STUDIO Nov 01. 2022

선한 오지랖이 없는 사회

2022.11.1

선한 오지랖이 없는 사회 



지난 29일 이태원 참사가 있었다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일개 민간인으로서 혼란스러운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적은 글일 뿐 어떤 전문적인 평가나 판단기준을 제시하는 글이 아님을 먼저 예고하는 바이다 


희생자 중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10대-30대 초반이다. 그중 다수가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의 청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일 할 젊은이가 없다고 아우성이고 출산율이 적어 국가의 미래가 암울하다고 걱정하는 지도층의 염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속절없이 젊은이들을 잃어버렸다. 

2014년에 고등학생이 성장하였으면 지금쯤 20대 중 후반의 어엿한 청년이 되어 있으리라. 또다시 아이들을 잃어버렸다. 


사고의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종류의 민간 참사는 매우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공공 행정이 미쳐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매번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사람들은 책임 추궁할 대상을 찾고 마녀 사냥을 하려는 심리가 있는데 이번에는 그 표적이 마땅치 않다. 이번 운집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모인 것이기 때문이다. 

정권은 누구 하나 기관장 옷을 벗겨서 재난사태에 대한 군중의 울분과 비난의 마음을 풀어주려 하겠지만 이번 일은 그렇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일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놀이하는 일까지 모두 기관장더러 책임지라고 하면 우리 사회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통제사회가 될 것이다. 이는 안 될 일이다. 


먼저 유흥문화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생각 없이 비난하는 사람들은 말을 삼가야 할 것이다. 

여가를 보내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 있을 뿐이고 어르신들의 등산문화와 막걸리 마시는 문화가 이태원 거리에서 코스튬을 하고 축제를 즐기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각 세대의 문화적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재난 며칠 전 같은 이태원 지역에서 지구촌 문화축제도 연인원 30만 명 정도 행사를 진행하였기 때문에 10만 명 운집 자체에는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도 그리 틀린 판단은 아니었을 것이다. 

월드컵, 촛불집회, 서초동 집회는 어떠했는가? 광화문에 100만 명이 넘게 운집하였다. 좌우 불문하고 더한 밀도에도 질서 있고 청결하게 자발적으로 운영해본 시민적 경험이 우리에겐 있었다. 


그럼 무엇이 문제였을까? 


재난 사건 3시간 전 정체를 일부 풀었던 상황이 있었다는 흥미로운 기사를 보았다. 좁은 경사로 병목 정체구간에 한 사람이 있었다. 


한 여성이 외쳤다. "앞으로 전달해 주세요, 밑에. 여기 뒤에 꽉 막혀 있으니까 못 올라온다고. 잠시 올라오실 분 대기해 주시고 내려가실 분만 이동해요."조금씩 정체가 풀리고 좁은 길에서 사람들이 내려가졌다. 

"올라오시지 말고 기다리세요, 올라오실 분은. 내려가는 거 먼저예요." 그 여성은 외쳤다. 조금씩 막혔던 것이 풀어지고 사람들은 이동할 수 있었다.


재난의 현장에 그 한 사람이 있었으면 어쩌면 참사를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에 국가 탓을 하고 행정과 시스템 탓을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물론 재난 안전 시스템도 꼭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거리와 모든 민간이 모이는 유흥과 여가활동까지 경찰과 소방대원과 안전지도자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국가가 국민을 유치원생 정도로 간주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매번 경찰과 공권력을 의지하는 것은 시민의 자유와 책임감 수준을 낮게 어림 잡는 것이다. 

시민에게는 자유가 있다. 하지만 그 자유에는 예리한 상황 판단을 가지고 문제 상황을 지혜 있게 풀어갈 수 있는 오지랖 넓고 선한 책임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있어야 그 자유가 존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에는 힘이 있다. 

특정 불쾌한 상황을 비꼬는 언어가 붙는 순간 그 행위는 사회적으로 제약받는다. '꼰대', '오지랖'과 같은 언어들이 그 예시이다. 그동안 기성세대의 부정적인 권위 행사를 제한하기 위해 이러한 언어들이 발명되었다. 사회적으로 오지랖과 꼰대 같은 행동이 불편한 행위로 자리매김되었고 더 이상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것이 특히 젊은이에게 이래라저래라 참견하지 않는 것이 사회적 미덕이 되어 가고 있다. 욕먹을 것에 대한 두려움을 누구나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이를 떠나서 꼰대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재난적 상황에서는 다르다. 누군가 욕을 먹더라도 오지랖을 떠는 한 사람이 필요하다. 특히 재난상황 3시간 전에 일부 골목의 정체를 풀었던 한 여성처럼 다수가 멘털이 붕괴된 상황에서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위험 신호를 보내주는 그 한 사람이 필요하다. 꿀벌들도 개미들도 위험신호를 계속해서 서로 주고받는다. 인간은 언어라는 훌륭한 소통 도구를 가지고도 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재난과 위기를 피할 수 없다.


나는 그 한 사람의 숫자가 백의 한 명씩만 있었더라면 어쩌면 이태원 거리의 참사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하지만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할 백의 한 명이 없어 오백에 한 명 혹은 천 명에 한 명 있었고 혹은 있다 하더라도 괜한 '오지랖' 떠는 게 싫어서 소위 '나대는 게' 싫어서 잠잠 코 있었다면....  게다가 이 정도 밀도와 운집은 평소 지하철에서도 많이 겪어 보았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안일한 생각이 더해져서 이러한 비극적 사태로 번진 것이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추론해 본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만원 버스에서 짐이 많은 소심한 소녀가 사람들을 비집고 힘겹게 하차벨을 누르고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하차문은 곧 닫혔고 그 소녀는 '아 어! 저기요" 기어가는 목소리로 당황한 표현만 할 뿐 그 목소리는 버스 기사에게 닿지 않았다.소녀는 울먹였고 무거운 짐을 들고 다음 정거장에 내려서 먼길 돌아가는 힘겨운 상황이 충분히 예상되었다. 같은 버스에 타고 있던 우리는 어떤 반응을 취할 것인가? 


1번. 인생 원래 그런 거야. 자기 목소리 자기가 내지 못하면 이런 고생하는 거 한 번은 겪어봐야 이 소녀도 성장하지. 그리고 그 다지 큰 어려움도 아니고 한 정거장 돌아가는 것쯤이야. 쯧쯧 고생 좀 해라. 하고 아무 소리 안 한다. 


2번. 아 버스에 왜 이리 사람 많은 거야 짜증 나 잰 뭐야 문 앞에서 우물쭈물 거추장스러워 다음에 나 내릴 때 거슬리게... 하고 애초에 소녀의 상황에 대해 관심이 없다. 


3번. 소녀의 안타까운 상황을 예측하고 "기사님! 아직 사람 못 내렸어요. 문 열어줘요!라고 오지랖 넓게 큰 목소리를 대신 내준다. 그리고 소녀는 고맙습니다 하고 내리게 된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일상의 거리에서 모르는 익명의 사람들에게 베푸는 친절과 환대는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하는 행위는 아니다. 

나에게 돌아오면 다행이지만 사실 통계적으로 내가 베푸는 만큼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그저 내면의 동기에서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사소한 선택이지만 이러한 선택들이 모여서 거리를 완성한다.


단언컨대 위기의 상황에서 이러한 친절과 환대를 베푸는 사람이 백에 한 명 오십에 한 명이 있다면 우리는 재난적 위기를 넘길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의 감시와 통제 없이도 자유롭게 거리를 신뢰하며 다닐 수 있게된다. 신뢰와 환대가 있는 거리는 어떤 수백의 안전요원이 관리하는 공간보다 훨씬 안전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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