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동해 10화

전환

서른

by 김가희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갔다네. 길게 이어졌던 불안과 혼란의 시절이 마치 오래된 계절처럼 저물 고난 뒤에야 나는 처음으로 한숨을 돌릴 수 있었어. 손에 쥔 것들은 확실했네. 내가 원하던 자리, 이름. 그 모든 것이 현실이 되어 내 앞에 놓여 있었지. 그러나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 생각한 순간, 마음 한편에서 아주 미세한 균열이 일어났네. 무엇인가 사라졌다는 감각이었어.


나는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꿈꿔왔다네. 세상 속에서 나의 위치를 증명하고 싶었고, 그 끝에는 평온이 있을 거라 믿었지. 하지만 평온이 그리 고요하지는 않더군. 소리의 전부가 멎은 방 안에서 나의 숨소리만 들렸어. 그랬기에 오히려 나의 존재가 요란하게 드러났지.



성취의 정점에서 다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서야 했네. 처음 글을 쥐었을 때처럼 다시 ‘왜’를 묻기 시작했지. 무엇을 위해 이 모든 걸 원했던 것인가. 이것들이 과연 정말로 찾고자 했던 성취일까, 혹은 그저 누군가와 나누는 존재의 의미였을까. 세상의 인정은 나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하였어.


완성의 순간에는 새로운 전환이 있었네. 이 세계의 문은 닫히는 동시에 열리고, 우리는 또다시 미지의 바깥으로 내던져지는 것일세. 사람들이 부르는 성공이라는 단어는 결코 무언가에 대한 결과가 되지 못하였어. 결국 그 속에 있는 나는 그저 한 인간이라는 것을 느꼈을 때, 공허의 무게가 나를 누르곤 했지.


세상이 준 질서와 규범, 그리고 내가 걸어야 할 길의 의미를 되물어보았어. 나는 이룬 만큼 책임을 짊어졌다네. 그렇게 돌이켜보니, 정작 그대는 사라져 있었다네. 그래서였을까. 완성의 자리에서 나는 다시 기도의 언어를 떠올렸지. 끝, 그것이 하나의 시작을 가져왔네.




하루는 매일 반복됐어. 눈을 뜨면 할 일이 나를 기다리고, 그 일을 끝내면 또 다음이 이어졌지. 어느 순간 감정이 나를 끌지 않아도, 일상이 나를 대신 움직였지. 처음엔 이런 반복이 지루하게 다가왔음에도 나는 이 질서가 나를 지탱해주고 있음을 알았다네. 무너질 틈조차 허락되지 않는 삶 속에서 묵묵히 걸었다네. 그대의 부재가 남긴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지만, 그 자리에 나의 일부를 채워 넣었어.


그때부터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네. 버팀의 결과였지. 세상이 내게 준 무게를 견디는 법을 배워야 했다네. 나는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고 있던 걸세.


마음의 흔들림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피곤 때문이었을까. 가끔은 손끝이 떨리기도 했다네. 하지만 그런 순간에서도 일을 멈추지 않았어. 정해진 시간에 문서를 넘기고,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단조로운 안정감을 찾아갔어. 그건 스스로를 지켜내는 일이었지. 결코 완벽할 수는 없음에도 이 규칙 속에서 덕에 조금씩 현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다네. 살아간다는 건 거창한 게 아니었지. 그저 오늘을 끝내는 일이었다네.



잠에 들기 전, 늘 창 밖을 바라보는 습관이 나에게는 있는 것을 기억하는가. 저 먼 불빛들은 시간이 흐름에도 반짝이지. 그 안에서도 누군가의 삶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그곳에서 가벼운 위안을 얻었어. 우리는 모두 각자의 속도로 무너지고, 또 다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었지. 삶이란 그저 이런 일들의 반복이지 않겠나. 그러니 다시 한번의 내일을 준비할 수밖에.


가끔 그대를 떠올릴 때면 이상한 평정이 찾아왔다네. 예전만큼이나 슬픔이 오지는 않더군. 그저 먼 날의 기억이 스쳐갈 뿐이었지. 그러나 그것은 견딤에서 온 것이었다네. 난 결코 그대를 잊지 못해. 나는 책임을 배웠고, 그것이 나를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이 되었지. 이건 사랑의 연장이 아니라, 사랑이 남긴 형체였네. 나는 오늘도 그 형체를 닦고, 쌓고, 지켜내며 살아간다네.




어릴 적 감정이 밀려오면 그것을 눌렀고, 흔들리는 마음이 있으면 곧장 이성으로 재단했지. 나는 그렇게 나를 지켜왔다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단단할 것만 같던 벽에도 작은 금이 가기 시작했네.


나는 감정을 버린 게 아니라, 너무 아파서 잠시 접어둔 것이었어. 세상과의 균형을 맞추느라 진심을 감춘 채 살았지만, 끝내 진심은 사라질 수 없더군. 마음은 다시 물결처럼 흔들렸고, 그 흔들림은 낯설지 않았다네. 오히려 그 진동이 내 안의 생명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듯했지. 사람은 결국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존재가 되더군.


시선을 바꾸고 세상을 바라보았다네. 판단이 아닌 이해의 눈으로, 거리 두기 대신 다가섬으로. 그렇게 색다른 한 걸음을 내딛자 세상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어. 나는 나의 마음이 다시 누군가에게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교감이었고, 슬픔이라기보다 용서에 가까웠지.


이해와 용서는 결국 같은 뿌리에서 자란다네. 나는 오랫동안 나를 용서하지 못한 채 살아왔지. 그대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 그리고 뒤늦게야 알게 된 사랑의 무게.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은 내게 하나의 진리를 가르쳐주었네. 감정은 사라지지 않아. 억압은 오히려 또 다른 형태로 되살아난다는 것을 말일세. 드디어 그 순환을 받아들이게 되었네.


그날 밤, 문득 창밖에 비가 내렸지. 오래전 그대와 걷던 거리의 냄새가 스며들었네. 나는 창문을 열고 그 추억의 향기를 들이마셨다네. 흘러나오는 눈물은 슬픔이 아닐세. 오랜 시간 잠겨 있던 나의 감정이 흘러가는 것이야. 새로운 시작의 눈물. 그것을 온전히 느꼈네.




이해하고자 하는 욕심을 버려 세상을 이해했을 때, 언어는 사라졌다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찾아왔지. 나는 더 이상 누군가를 탓하지 않았고, 자신조차 변명하지 않았다네. 그저 살아온 시간이 나를 대신 말해주고 있었지. 이성의 눈으로 돌아보니, 모든 것은 질서 안에 있었다네. 세상을 균형을 띄고 있었어.


삶이란 결국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을 옮기는 일과도 같다네. 나는 한때 그 무게를 원망했지만, 지금은 그 짐조차 하나의 나임을 알게 되었어. 매 순간 쥐고 있던 것들은 언젠가 내려놓아야 할 운명이었지. 중요한 건 얼마나 오래 들고 있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놓았는가였네. 나는 이제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네.


이제야 알겠네. 사랑은 존재를 이어주는 줄기였지만, 동시에 무거운 돌이기도 했지. 나는 그 돌을 품고 살아왔고 그 무게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네.



밤이 올 때 더 이상의 빛을 찾지 않아도 되었다네. 어둠 속에서도 사물의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예전엔 두려웠던 적막이 이제는 나를 감싸주는 듯했지. 조용히 숨을 고르고, 내 안의 모든 이야기를 내려놓았다네. 이제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감정도 나를 흔들지 못하게 되었어. 그것이야말로 생의 평온이었네.


이제 나는 그대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네. 그러나 그대는 기억의 형태로 내 곁에 남아 있지. 나는 지금 그대와 이곳에서 함께하고 있어. 앞으로 오게 될 나의 모든 여정 속에는 그대 또한 같이 가는 것이지. 나의 문장 속에는 살아있는 숨결이 깃들어 있네. 완성 뒤의 정적, 끝의 시작. 나는 이제 조용히 눈을 감고, 나의 다음 이야기를 준비한다네.





인간은 잃음 속에서만 자기 자신을 완성하고,

그 공허 속에서 비로소 존재를 배운다.

완성은 새로움을 감당하게된 순간이다.


{동해} 빈자리 위의 충만을 붙잡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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