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동해 11화

곡예

서른셋

by 김가희





모든 것이 밝아지는 듯했네. 그동안 준비해 온 일들이 마침내 세상에 닿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나를 향해 미소를 건넸지. 그들의 말과 시선 속에서 나는 한순간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또렷이 알 수 있었네. 그러나 그 환희의 빛은 어쩐지 내 마음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지 않았어. 말하지 못한 어떤 진심이 조용히 움츠리고 있었거든. 환호의 소리가 클수록, 내 안, 그 어떤 마음은 더 어두워져만 갔다네.


나는 그날의 나를 떠올렸네. 모두 앞에서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무대를 밟았지만, 이상하게도 한걸음 뒤에서는 오래된 그림자가 발목을 잡고 있었어. 어릴 적부터 남겨두었던 감정 하나가 그날따라 유난히 또렷하게 떠오르더군. 성공이 나를 채워줄 줄 알았는데, 그 순간 문득 아직 덜 말해진 무언가 있다는 사실만이 선명해졌네.


누군가에게 솔직해지는 것이 늘 두려웠던 어린 마음, 감정이 상처가 되어 돌아오던 날들, 그리고 그때부터 생긴 이 조심스러움. 지금의 환희는 마치 그 오래된 시절과 기묘하게 맞물려 있었지. 사람들은 나를 향해 따뜻하게 웃는데, 나는 오히려 그 따뜻함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멀찍이 서 있었네. 그때처럼, 문턱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던 어린 나처럼 말이야.


그래서였던가. 마음 한구석이 시렸네. 누구도 내게 부족함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스스로 그 결핍을 느꼈지. 마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음에도 유독 나만 문밖에 나와 서 있는 듯했거든. 세상은 나를 환영하는 듯했지만, 나는 그 환영에 한 발 늦게 도착한 사람처럼 느껴졌네. 혹은 아예 초대받지 못한 이처럼. 분명 그들과 함께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 뒤 허전함은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차갑게 남아 있었지.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균열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지. 환희는 분명 환희였으나, 그 틈에서 새어 나오는 공기는 차가웠네. 내가 드러난다는 사실은 분명 기쁜 일인데, 정작 가장 중요한 마음들은 미처 드러나지 못한 채 그늘에 남아 있었던 거야. 나는 그 그늘을 외면한 채 또다시 환호 속으로 걸어 들어갔네. 마치 그 소리라면 모든 결핍을 덮어줄 거라 믿기라도 한 듯이 말이야.




그날, 기척 하나 없는 방 안에서, 나는 마치 숨을 들이쉴 때마다 내심의 균열이 더 벌어지는 소리를 듣는 듯했네. 낮 동안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모든 순간이, 어둠 속에서는 차갑고 날카로운 실체를 드러냈지.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네. 그 밤의 나는 버티는 것이 아니라 붕괴를 미뤄두고 있었을 뿐이었네.


그러다 문득 낮의 밝음이 떠올랐네. 태양 아래 서 있던 그 순간, 곧 마음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스쳤지. 따뜻한 빛 속에서 나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네. 숨기고 싶지도 않았지. 하지만 말로 내기엔 너무 오래 눌러온 감정이었어. 그 빛은 나를 살리면서 동시에 나를 고백으로 몰아붙였네. 어린 날의 나는 빛 앞에서만 울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날의 나도 바로 그 순간을 떠올리더군. 더는 숨기기 어려운 진심이 내 가슴 안쪽까지 밀려왔네.


나는 그 진심을 끝내 말하지 못했네. 감정은 문턱까지 차올랐지만, 나의 몸은 오래된 방식대로 먼저 움직였지. 나는 또다시 마음을 억눌렀네. 무너질 것 같다는 불안보다, 드러나면 모든 게 끝난다는 공포가 더 컸어.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섰네. 그 모습은 강해 보였겠지만 실은 정반대였지. 그날의 나는 살기 위해 감정을 죽이는 인간이었네. 내 안에서 끓는 것을 억누르는 데 온 힘을 쓰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또 하루를 밀어붙였네. 전진하면 괜찮아질 거라 믿었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뒤에 남겨졌지. 겉으로는 흔들림 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속에서는 작은 떨림들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네. 조금만 느슨해지면 감정이 터져버릴 것 같은 긴장 속에서 더 빠르게 걸었어. 나 자신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계속 움직였던 거야. 멈추는 순간, 감정이 나를 집어삼킬 것을 알았으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아주 조용하게 무너졌네. 누구도 모르게, 소리도 없이. 마음이 나를 떠나버린 것 같은 공허가 찾아왔어. 더 밀어붙일 힘도, 더 숨길 이유도 남아 있지 않았네. 나는 나에게 돌아올 길을 잃어버리고 있었지.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인정했네. 감정이 없어진 게 아니라, 내가 너무 오래 감정을 밀어내 왔다는 사실을.




뜻밖의 용기를 택했네.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고, 대비하지도 않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감정의 움직임이었지. 바보처럼 단순한 마음이었네. 이젠 더 숨길 수 없다는 자각이 번개처럼 가슴을 쳤고, 나는 순간적으로 무장을 풀어버렸지. 그 결정에는 어떤 계산도 없었네. 단지 내 감정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했을 뿐일세. 그날의 나는 비로소 나 자신에게 정직해지려는 첫 발을 내디뎠네. 어쩌면 그 순간이야말로, 내가 가장 살아 있었던 때였을지도 몰라.


하지만 진심이 드러나면, 반드시 선택이 따라오더군. 나는 두 갈래의 길 앞에 다시 서 있었네. 하나는 지금껏 유지해 온 단단한 외피를 계속 끌고 가는 길, 다른 하나는 내가 숨겨온 마음을 세상에 내보내는 길이었다네. 어느 쪽도 가볍지 않았지. 둘을 동시에 품을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그건 착각이었네. 결국 선택은 관계였고, 나는 누구를 향해 마음이 기울어 있는지 더 이상 속일 수 없었어. 그 방향을 아는 순간, 오랫동안 눌러두었던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네. 그것은 두려움과 안도의 묘한 혼합이었지.


나는 그때 처음으로 감정의 깊이를 보았네. 표면만 스쳐 지나가던 감정이 아니라, 더 깊고 더 오래된 진심이었지. 그동안 외면해 온 마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나를 끌어당겼네. 이 감정은 가벼운 호기심이나 순간적인 흔들림이 아니었지. 나를 지탱해 온 근원적인 무언가였고,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내면의 중심이었네. 나는 그 중심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어. 도망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닫고 말이야. 이제야 비로소 감정이 나를 찾아온 듯했네.


내 감정은 이미 문턱을 넘어서 있었고, 나는 그 흐름을 막을 힘을 잃었네. 대신 나는 조용히 받아들이기로 했지. 이 감정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든, 이제는 함께 가보겠다고. 그 결심이 처음으로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네.




감정은 결국 나를 잠식했네. 그러나 그 잠식이 파괴만을 뜻한 것은 아니야. 오히려 이제 어디로 향할 것인지 묻고 있었지. 갑작스럽게 커진 이 조용한 파도 속에서, 처음으로 나 자신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마주하고 있었네. 더는 회피할 수 없는 자리였지.


그때부터 나는 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듯한 기묘한 시선을 얻었네. 마치 높은 곳에서 세계의 윤곽을 다시 내려다보는 느낌이었지. 나는 지금까지 좁은 틈새 속에서만 나를 판단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네. 눈을 들어보니, 선택 이후의 세계가 이전보다 훨씬 넓게 펼쳐져 있었어. 나는 그 넓은 세계를 향해 조용히 손을 뻗었네.


떠나기로 결심했네. 어둠 속에서 내 감정을 숨기며 버티던 자리에서, 더 이상 나를 보호하지 않던 방식들에서,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지. 아무도 모르게 시작된 이동이었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앞으로 걸었네. 마음은 아직 완전히 다 아문 것은 아니었지만, 더는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편안해졌지. 나를 잃어가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어. 새로운 강을 건너고 있던 걸세.


건너간 자리에서 오랜만에 스스로의 중심을 느꼈네. 흔들리기만 했던 마음이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마침내 무너진 구조를 다시 세울 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 이 힘은 누군가가 준 것이 아니었네. 감정을 인정하고, 선택하고, 떠난 그 순간부터 이미 생겨나고 있었지. 나는 더 이상 숨기지 않았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으려 했네. 삶을 내가 결정한다는 이 단단한 자각이 내 안에서 뼈처럼 자리를 잡더군. 그것이 바로 나만의 중심, 나만의 뿌리였네.


감정은 더 이상 나를 잠식하는 그림자가 아니었고, 세계는 더 이상 나를 위축시키는 무대가 아니었어. 나는 나의 자리를 만든 사람이 되었고, 마침내 그 자리 위에 단단히 서게 되었네. 내가 선택한 마음이 나를 이끌었고, 내가 다시 세운 구조가 나를 지켜주었지.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적어두네. 세상은 결국, 자신을 주인으로 삼는 이에게만 문을 열어준다고. 그리고 그 문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고 말이야.





인간은 감정을 숨길 때 흔들리고,

감정을 선택할 때 비로소 중심을 가진다.

그것은 곧 자기 존재의 원인을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두겠다는 근원적 결단이기 때문이다.


{동해} 빈자리 위의 충만을 붙잡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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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