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동해 09화

탐험

스물일곱

by 김가희





이제는 다시 시작해도 좋다는 부름을 받았어. 처음으로 나의 숨소리를 들었다네. 그동안의 고통이 무색하게 나는 무언가, 새로운 무언가 나의 인생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어. 오래 닫혀 있던 나의 마음이 문틈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지. 표현하고자 하는 힘이 차오르더군.


제자리. 나의 제자리는 어디였던가. 흩어졌던 조각들은 그간 하나씩 모여왔었던 걸세. 그것들이 합쳐져 다시금 하나가 되는 순간, 나는 그동안 잃었다고 믿어왔던 모든 것들이 내 안에 고스란히 존재했음을 알았지. 주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야. 사람들의 웃음과 말, 계절의 그림자까지도 나의 언어가 되어 쌓여 있었지.


마음의 바닥에서 무언가가 일렁였네. 설명할 수 없는 충동, 그러나 분명히 나를 앞으로 밀어내는 힘이었지. 나는 손에 닿는 것들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네. 창문을 스치는 빛, 식탁 위의 유리컵, 바닥에 떨어진 먼지까지도 하나의 언어처럼 느껴졌지. 그것은 세상이 나를 통해 말을 거는 방식이었다네. 그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창조의 숨결을 느꼈다네.



손끝이 움직이기 시작했네. 카메라를 들고 세상을 향해 조심스레 렌즈를 맞췄지. 나는 대상을 찍은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나를 찍고 있었네. 셔터를 누르는 찰나마다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어. 두려움과 설렘, 고요와 열망이 동시에 흘러나왔네. 마치 오래된 침묵이 빛으로 번역되는 듯했지. 나는 그것을 시작이라 불렀다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같은 길을 걸으며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네. 사람들은 여전히 분주했고, 거리는 여전히 익숙했지만, 나는 그 속에서 전혀 새로운 질서를 발견했지. 모든 사물에는 자리를 잃은 듯 보이면서도 제 자리를 지키는 고유한 무늬가 있었네. 나는 그 무늬를 따라 걸었고, 그 안에서 나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지. 그것이 아마, 내가 세상에 다시 말을 걸기 시작한 첫날이었을 거야.




완전히 무너졌다고 믿었던 마음 한편에서 아직 숨 쉬는 조각이 있었지. 그건 작고 불안정했지만, 분명히 살아 있었네. 나는 그 조각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지. 따뜻함이 번져 오르자, 어둠 속에서도 세상이 아주 조금은 밝아졌네. 절망 끝에서도 이렇게 부드러운 감정이 남아 있었다니,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지. 나는 다시 숨을 들이마셨네.


세상과의 거리를 두었지만,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평화로웠네. 외로움이 나를 무겁게 누르던 시간은 끝났지. 대신 잔잔한 온기가 가슴 안을 천천히 채워갔네. 사람들의 목소리 대신 바람의 숨결이 들렸고, 누군가의 시선 대신 그림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네. 나는 더 이상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느끼는 사람이 되어 있었지. 아주 작지만, 진심으로 살아 있는 듯한 감각이었네.


세상이 거꾸로 보이는 순간조차, 이제는 두렵지 않았지. 호기심이 나를 이끌었네. 새로운 질서가 피어나고 있었지. 나는 그 낯선 풍경을 어린아이처럼 바라보았네. 무엇이 맞고 틀린 지를 따지기보다, 그저 보고, 듣고, 느꼈지. 멈춘 세상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생명들을, 내 안의 새로운 언어로 받아들였네. 그건 다시 사랑을 배우는 일과도 닮아 있었지.


달빛이 스며드는 밤이면, 유난히도 마음이 부드러워졌네. 달은 아무 말 없이 세상을 감싸 안지. 완전하지 않아 더 아름다운 빛, 그 아래서 나는 잠시 눈물을 삼켰어.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아픔이 아니라 회복의 신호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네. 달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눈빛 속에서 오래된 위로를 발견했네.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네.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저 앞으로 나아갔지. 멈춰 서면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갈 것 같았거든. 나는 내 안에서 잊혔던 목소리들을 하나씩 되찾았네. 그것은 오래전부터 나를 불러온 목소리였지. 세상보다 더 깊은 곳에서, 내가 누구였는지를 일깨워주는 목소리. 나는 그 부름에 응답하듯 카메라를 다시 손에 쥐었네. 이번엔 단순히 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기 위해서였지.


고요 속에는 결정의 울림이 있었네. 나는 오래 미뤄두었던 선택들을 하나씩 정리했지. 붙잡을 것은 붙잡고, 놓아야 할 것은 놓았네. 그렇게 해야만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걸 알았던 것이야. 여전히 과거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붙잡힘을 거절했네. 나는 작별 인사를 건넸지. 고마웠다네, 하지만 이제는 가야 할 때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오래된 나를 천천히 떠나보냈다네.



변형은 무언가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한다네. 그런 죽음은 결코 두렵지 않아. 오히려 그 어둠 속에서야 진짜 나의 형체가 드러나는 듯하지. 무언가에 대한 끝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의 두 눈은 선명해진다네. 그렇게 마침내 마주한 또 다른 길은 나를 분명히 보여줬어.


세상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그 어둠 안에서 나는 나를 분명히 보았지. 무너진 것들 위에 피어오르는 새로운 숨결, 그것이 내 생의 진짜 시작이었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다시 길 위에 섰네. 예전과 같은 길이지만, 걸음은 달랐지. 나는 과거의 그림자를 등에 지고, 새로운 빛을 향해 나아갔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바람이 나를 살리고 있었지. 죽음이 끝이라면, 나는 이미 수차례 끝났고, 그만큼 다시 태어났네. 이번엔 멈추지 않을 거야. 세상은 여전히 낯설지만, 낯섦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이니. 나는 오늘도 그 증거를 안고 걸어가고 있다네.





새로운 길 위에서 멈춰 섰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잠시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서로 교차했지. 여전히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두 다리를 고정했어. 균형을 잡는 일은 늘 위태롭다네. 나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머무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느꼈다네. 그건 선택의 다른 형태였지.


그렇게 마음 한가운데에서 잔잔한 물결이 일었네. 차가운 물결의 흐름 속엔 따스한 온도가 숨어 있었어. 나는 그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네. 누구를 향한 것도, 무엇을 위한 것도 아닌, 그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피어나는 감정이었지. 나를 처음으로 온전히 안아주었네. 오래 미뤄둔 위로가 그제야 제자리를 찾은 듯했어. 사랑은 결국 방향이 아니라, 상태라는 걸 알았네.


달라지지 않은 세상 속에서 내가 달라졌네. 그것을 그저 바라보고, 느끼고, 받아들였네. 판단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이해였지. 날 선 타인의 말속에서도 온기를 느낄 수 있었네. 모든 것이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았어. 완전하지 않기에 세상과 더 가까워질 수 있었지.



움직이지 않아도 세계. 그 흐름 속에 나를 맡겼네. 더 이상 통제하지 않아도 괜찮았지. 세상은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나 역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네. 그건 내가 그토록 오래 기다려온 평화의 모양이었다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알았네. 모든 길은 멈춤과 함께 이어진다는 것을. 나의 창조는 고요에서 피어났고, 사랑은 고립 속에서 자라났지. 세상을 향해 있던 시선은 다시 나를 향해 돌아왔네. 그러나 그 시선은 더 이상 외롭지는 않았어. 나는 나를 온전히 품었고, 그 이해가 세상과 나를 잇는 다리가 되었네.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나는 속삭였지. 불빛이 꺼진 방 안에서도, 나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네.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목격했다.

멈춤의 끝에서야 알았다.

창조는 파괴의 다른 이름이었다.


{동해} 빈자리 위의 충만을 붙잡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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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