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동해 08화

저울

스물넷

by 김가희





투명한 공기. 나는 오래 있던 자리를 떠나며 스스로의 숨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네. 익숙한 온기가 나를 잡아두었고 더 이상 그 안에서 점점 작아지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어. 사람들 틈에서 나라는 존재가 서서히 희미해져 가는 게 보였다네. 그것은 고통이라기보다 단지 한 시절의 끝이었네.


세상은 조용하게 잔혹하더군. 따뜻한 얼굴 뒤에서 흘러나오는 말의 온도는 언제나 차가웠지. 그것이 세상의 질서라는 걸 그때 배웠다네. 나는 따뜻한 소속을 원했어. 그러나 문을 열어도 맞아주는 이는 없었기에 나는 언제나 바깥에서 서성였지.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끝내 남는 건 공허감뿐이었다네. 그럼에도 미워하지 않았어.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을 살아내는 중이었으니까.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게 어른이 되는 것의 첫걸음이었네.


문 밖으로 나오자 매서운 바람이 내 뺨을 스쳤네.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지날 때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었어. 이제야 진실된 계절을 느끼는 것 같았지. 관계로부터 멀어지자, 오히려 나를 감싸던 따뜻함이 무엇이었는지 또렷하게 보이더군. 고립은 외로움을 넘어 잠시 쉬어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네. 그 속에서 나는 나의 목소리를 다시 들어주었어. 숨을 고르며 나를 달래는 법을 배웠지. 아무도 모르게, 아주 작게.




매일 같이 책상 위 물건들을 줄 세우며 안정을 흉내 냈었어. 하지만 그건 그저 견디기 위한 통제였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아버렸네. 균형이라는 말은 듣기 좋은 말속에서 늘 무엇인가를 눌러야 했지. 평온은 나를 조금씩 마비시켰어. 감정이 일렁일 때마다 견딜 수가 없는 나머지 어느 순간 그것을 정리해 버렸다네.


밤이 깊어질수록 억눌린 감정들이 꿈처럼 되살아났어. 과거의 장면들이 불쑥 찾아와 그땐 왜 눈물 흘리지 않았느냐 물었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울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네. 두 눈에 맺힌 물결이 떨어지면 모든 게 무너질까 두려웠던 거야. 늘 그런 떨림을 안고 살았어. 늘 스스로를 다스린다 믿었지만, 사실은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네. 그것이야말로 공포였어.


세상이 냉정하다고 말해왔지만 정작 이곳을 얼어붙게 만든 건 나였다네.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운다며 나는 감정을 질식시켰지. 그렇게 무너진 깊은 곳에서 이상한 열이 올라왔어. 그것은 분노와 외로움이 섞인, 설명할 수 없는 욕망이었지. 사랑받고 싶다는 단순한 열망조차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네. 품위를 지키려 애쓰며 언제나 타인의 시선과 함께 있었어. 나는 내가 아니었다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균열이 일어났네. 아무 일도 아니라는 그 한마디에 나는 예상치 못한 분노가 들었어. 예민한 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었음에도 온몸이 끓어오르는 나를 보며 느꼈지. 그간 배려라는 이기심으로 나를 감금해 왔던 것을 말이야. 나를 지키던 질서가 어느새 족쇄가 되어 있었다네. 미소 짓는 얼굴 아래, 오랫동안 억눌린 본능이 꿈틀대는 걸 느꼈지.


나는 완벽하지 않네. 그제야 완벽의 실체를 벗어나려 했어. 절제와 냉정만으로는 나를 구할 수 없던 것이야. 그 안엔 늘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붙잡히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 나는 자유를 외쳤지만 사실 모든 것의 통제를 원했네. 사랑을 희망하며 상처받을까 미리 도망쳤지. 그 모든 모순이 나였다네. 겸. 이런 이기적인 욕망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로 향하는 길일까?




감정은 나를 흔들 수 있지만, 결국 나를 지탱하는 건 판단과 절제였네. 한마디의 말은 더욱 깊은 고립을 만들었고, 오직 나를 부드럽게 드러낼 때에만 작은 균형이 찾아왔지. 겸. 관계란 인간의 대가라네. 필요에 의해 쉽게 열리는 문이 있었어. 그 문턱에는 늘 저울이 있었다네. 주고받는 무게가 맞아야만 그 관계의 문이 열렸지.


나는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네. 무너진 마음을 주워 담듯, 작은 일들을 하나씩 이어갔지. 그것이 거창한 변화는 아니었네. 다만 손끝의 온기가 내 생각보다 정직하다는 걸 알았어. 감정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손이 움직일 때만큼은 잠잠했네. 그렇게 나는 스스로의 질서를 다시 세웠지. 이전의 통제를 벗어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리듬으로.


반복은 지루하지 않았네. 오히려 그 안에서 마음이 정리되었지. 완벽하려는 강박이 사라지자 나는 더욱이 집중할 수 있었네. 상시 감정의 파도가 밀려옴에도 그 흐름을 두려워하지 않았어. 손끝에 닿는 사소한 감각들, 바람의 온도, 하루의 소음들이 모여 나를 지탱해 주었네. 강압이 멈춰진 자리에서 몰입은 나를 다시 세우고 있었어.



그때부터였던 것이야. 삶이 이상하게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 게. 오래 닫혀 있던 문이 하나둘 열리며 우연처럼 보였던 일들이 맞물려 돌아갔네. 나는 그것을 운명이라 부르고 싶진 않았어. 다만 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지. 멈춰 있던 나날이 서서히 빛을 받으며 회전했네. 삶은 나를 버리지 않았더군. 그저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문득 희망에 대해 생각했어. 거창한 믿음이 아니라, 단지 살고 싶다는 조용한 바람의 기도를 말일세. 나는 다시 숨을 쉬고 있었네. 숨의 온도는 중요치 않아. 그저 그것이 내 것이란 사실이 위로가 되었어. 변덕스러운 세상과 복잡한 사람의 마음. 이상하게도 그것이 두렵지 않았지.


희망은 멀리 있지 않았어. 그건 내 안에서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지. 더 이상의 완벽을 꿈꾸지 않아. 다만 지금 이 삶의 질감을 느끼며, 그 안에서 조금씩 자라 가고 있네. 남겨진 상처의 자리에서 새로운 별이 피어나고 있었지. 나는 오늘도 그렇게 숨 쉬며 살아가네. 별빛 아래, 여전히 나의 길을 믿으며.




세상이 가르쳐준 방식을 버렸어. 내 몸의 리듬으로, 손끝이 느끼는 온도와 숨의 깊이로 살아가는 법을 익혔지. 실수는 더 이상 두려운 일이 아니었네. 그저 과정의 한 조각일 뿐이었지. 거짓된 완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어. 그러자 살아 있다는 감각이 잔잔히 피어났네.


불현듯 일어난 오래 눌러둔 감정. 그것은 분노도, 슬픔도 아닌 하나의 이야기였지. 그것을 무시하지 않았어. 오직 시간의 흐름을 따랐다네. 마음은 이미 길을 알고 있었더군. 그렇기에 머리로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네.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을 것이야. 겸. 우리는 그저 무거워진 걱정을 내리고 힘을 빼고 떠오르면 된다네.



침묵과 웃음이 자리를 잡자, 안과 밖의 경계가 희미해졌네. 생각과 감정, 내면과 세상이 서로 흘러들었지. 나는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세상 또한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네. 그 모호함이 오히려 좋았어. 나는 이 정거장에서 잠시 머무르고 있는 것이라네.


나는 이곳에 이름 없는 상태로 존재하네. 충분하다는 말조차 전부 사라졌지. 남은 건 그저 있음 뿐이야. 바람이 불고, 시간이 흘러가고, 나는 이 안에서 호흡을 반복한다네.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함이 나를 덮었어.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도 모든 게 이미 여기에 있었네.





완벽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나를 배웠다.

통제가 무너지고 나서야

삶은 숨을 쉬기 시작했다.


{동해} 빈자리 위의 충만을 붙잡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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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