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동해 12화

관리

서른여섯

by 김가희





며칠 사이 마음이 흔들렸었다네. 오래전부터 관계 속에서 마주하던 패배감이 다시금 떠오르는 것을 느꼈지.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 하면서도 정작 나의 마음은 늘 뒤로 물러나 숨곤 하였네.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이라 여겼지만, 결국 나를 더 고립시키는 길이었음을 이제야 알 것만 같아. 지난 시간 동안 나는 타인과의 작은 충돌조차 견디지 못해, 마음의 문을 단단히 닫아걸고 살았었지. 그 방어가 결국 내 마음을 더 피폐하게 했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 부정할 수 없게 되었네. 겸. 나는 그 지친 마음의 잔해 위에서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충동을 조심스레 느끼고 있다네.


그래서였을까, 마음을 열겠다는 생각이 찾아올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희미한 공포였네. 혹시나 다시 상처받지 않을까, 혹은 또다시 내가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천천히 밀려왔지. 나는 한때 누군가에게 솔직해지는 일이 세상의 모든 위험을 감수하는 일과 같다고 느꼈다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마음을 내어주는 행위를 피하며 살았지. 그러나 그대여, 이상하게도 그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다시 해보고 싶다는 작은 욕망이 일고 있었다네. 그것은 지워지지 않는 흉터처럼 오래 남아 있었지만, 동시에 지금의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작은 불씨였지.



그러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문득 마음이 가벼워지는 순간이 찾아왔지. 꼭 처음으로 걷는 아이처럼, 세상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이 밀려왔다네. 나는 그것을 충동이라 불러 보았지. 마음을 새로 열어보자는 충동, 신뢰라는 오래된 단어를 다시 손에 쥐어보려는 충동, 그동안 잊고 지냈던 애정의 감각을 다시 느껴보고 싶은 충동. 이것은 과거와 미래의 계산 없이 단순히 ‘지금’이라는 순간에서 나온 것이었네. 그때만큼은 조금 더 자유로웠고, 조금 더 담대하였지. 근거 없는 용기가 내 안을 스쳐 지나갔다네.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그 마음의 순도를 오래 들여다보았네. 그 충동에는 어떤 계획도, 어떤 보상도, 심지어 어떤 목적조차 없었지. 그저 지금의 나를 다시 살아보게 하는 숨결 같은 것이었네. 그 순간 감정을 다시 믿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고, 이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낯설면서도 반가웠다네. 어쩌면 내가 잃어버린 것은 감정 자체가 아니라 감정을 믿는 힘이었던지도 모르지. 그 충동은 어리숙하지만 정직했고, 무모하지만 진실하였네. 나는 그 낯선 용기에 조용히 손을 내밀고 있었어.


나는 단순한 충동을 결심으로 바꾸려는 의지가 마음 안에서 단단하게 자리 잡는 것을 느꼈네. 방향을 잃었던 나의 마음이 조금씩 주도권을 되찾아가고 있었네. 나는 관계를 두려워만 하던 사람이 아니었음을, 내 안에는 다시 시작할 힘이 있다는 것을 조금씩 인정하게 되었지. 마음을 새로 열겠다는 생각은 더 이상 우연한 기분이 아니었네. 그것은 나의 의지였고, 나의 선택이었고, 나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내적 권위의 회복이었지. 겸. 나는 이제 천천히라도 앞으로 걸음을 내디뎌 보려 한다네. 비록 흔들릴지라도, 이번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나아가 보려 하네.




마음을 다시 열어보려 한 첫 시도는 생각보다 서툴고 어색하였다네. 나는 아주 작은 행동 하나에도 다섯 번쯤 머뭇거렸지. 누군가에게 한 마디 더 건네보려 해도 가슴이 긴장으로 조여들었다네. 작은 시도들이 오히려 내 안에 쌓여왔던 피로를 뚜렷하게 드러냈지. 나는 오래전부터 너무 많은 것을 혼자 감당해 왔기에, 새로운 움직임조차 버거운 짐처럼 느껴졌네. 이 서툶은 단지 시작의 어려움이 아니라, 이미 깊숙이 쌓여 있던 소진의 조짐이었어.


작은 행동 하나에 지쳐버리는 나의 모습을 보고 잠시 멈춰 서야 했네. 예전의 나는 이런 피로를 애써 무시하며 앞으로 나아가곤 했지.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마음을 열겠다는 의지가 분명 있었음에도 몸과 정신은 그 의지를 받쳐주지 못하는 듯했지. 작은 시도조차 벅차다면, 그토록 오래 유지해 온 생활은 대체 어떤 상태였던 걸까. 그 시점에서야 나의 번아웃이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네. 스스로를 돌보지 않은 세월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네.



순간 나는 알게 되었지. 이 피로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며, 더는 이어갈 수 없는 선을 이미 넘었다는 것을. 종결의 순간이 내 삶에도 도달해 있었네. 이전의 방식은 이제 완전히 막다른 길에 다다라 있었다네. 더 밀어붙이는 것은 해결이 아니라 파괴에 가까웠지.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었네. 오래 붙잡고 있던 방식이 완전히 끝났다는 인식은 두려움이 아니라 해방이었네. 나는 그 지점에서 한계를 받아들였다네. 그것은 패배가 아닌, 새로운 출발을 위한 닫힘이었지.


이 종결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 깊은 곳에서 평온이 흘러나왔네. 마치 오래된 계절이 끝나고 새로운 공기가 스며드는 순간처럼 말일세. 이전의 방식으로는 더 살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나를 살게 할 문이었다네. 나는 그 문턱에 조용히 서서, 아직 익숙지 않은 감각들을 천천히 살펴보았지. 피로가 나를 덮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 달라져야 한다는 말 없는 요청이 일어나고 있었네. 끝을 인식한다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정리였지.


하지만 그대여, 나는 여전히 삶의 여러 조각들을 간신히 붙잡고 균형을 유지하는 척하고 있었지. 수면, 식사, 작업, 감정, 관계. 그 모든 것이 이미 한꺼번에 흐트러져 있었는데도 나는 계속 균형 잡힌 듯 행동해 왔네. 그것은 균형이 아니라 불안정한 곡예였지. 조금만 힘이 빠져도 전부가 무너질 수 있는 구조였다네. 나는 그제야 생활의 리듬을 다시 세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어갈 수 없다는 절박한 사실을 받아들였네. 이 무너짐의 자각이 곧 변화의 출발점이 되고 있었다네.




어느 날 나는 몸 깊은 곳에서부터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네. 잠을 줄여가며 버티던 시간이 쌓여서인지,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무언가가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스쳐 지나갔어. 처음엔 그것을 사소한 증상이라 여기고 지나치려 하였네. 그러나 그 통증은 사라지지 않고 밤까지 이어지며 나를 붙들었지. 결국 나는 그 자리에 앉아 한동안 숨을 고르며, 내가 어느 지점까지 와 있는지 조심스레 살펴보아야만 했네. 몸은 이제는 정말 더 갈 수 없다는 마지막 호소를 보낸 거였다네. 그 소리를 외면하는 것이 더는 가능하지 않았어.


그 통증을 붙잡은 채로, 그동안의 생활을 떠올렸다네. 새벽까지 불을 켜둔 방, 밥을 건너뛰며 몸을 혹사시키던 습관, 감정은 지쳐 있었는데도 계속 나를 밀어붙이던 지난 태도들. 그 모든 것들이 결국 나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참으로 쓰라렸지. 붙잡고 있던 버티는 방식과 이별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네. 마치 오래 함께했던 무엇과 결별하는 것처럼, 마음 한편이 찢어지는 느낌이 들더군.



하지만 균형을 위해 무엇을 내려놓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거칠었지. 정해진 시간에 쉬겠다고 다짐해도 몸은 쉽게 흘러가던 습관을 찾았고, 식사를 챙기겠다는 결심도 자주 무너졌네. 잠을 줄이며 일하던 과거의 방식이 자꾸만 나를 끌어당겼지. 나는 여러 번 흔들리며, 포기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큰 무게였는지 뼈저리게 느꼈다네. 그대여, 재정비는 꾸준한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붙잡고 있던 삶을 수차례 떠나는 과정이라네. 한 번 버린 줄 알았던 것들을 몇 번이고 다시 버려야 했네. 그것은 결코 매끄러운 변화가 아니었지.


그렇게 여러 번의 이별을 거치고 나서야, 내 안에서 아주 조용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네. 그저 지친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처럼, 잊고 지냈던 자기 연민이 은근히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네. 이것이야말로 승리와 회복의 시작이었지.




나는 여러 번 스스로에게 물었네. “왜 아직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가.” 그러나 대답은 쉽사리 오지 않았지. 변화는 몸과 삶에서 먼저 일어났지만, 정작 마음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한참 뒤에 남겨진 듯하였다네. 나는 그 지연을 이해하려 노력했지. 지나온 상처와 무력감이 사라졌다고 해서 금세 새로운 열정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변화는 때로 몸이 먼저 하고, 마음은 훨씬 뒤에야 따라오는 법이더군. 나는 그 늦은 걸음을 억지로 재촉하지 않기로 하였네. 마음에도 제 시간과 제 계절이 있으니까.


그러다 예고 없던 날, 특별한 사건 없이 마음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순간이 찾아왔다네. 기운이 살짝 돌아오는 듯하고, 멈춰 있던 감정이 아주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지. 나는 그 미세한 움직임 하나에도 긴 숨을 들이켜야 했네. 전환이 나를 찾아온 것이었지. 마치 삶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라고 손을 내미는 것처럼, 작은 흐름이 나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고 있었네.


나는 이상한 기세를 느꼈다네. 억눌렸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듯 마음이 빠르게 변하기 시작하였지. 슬픔과 후회, 그동안 미뤄두었던 분노와 아쉬움들이 차례로 떠오르며 나를 강하게 흔들었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 마치 삶이 오래 묵힌 감정을 한 번에 비워내게 하려는 듯한 기세였네. 겸. 나는 그 소용돌이에 몸을 맡기면서도, 이것이 나를 삼키는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위치로 데려가는 회전임을 직감하고 있었다네. 운명의 바퀴가 돌아가면 멈출 수도 거스를 수도 없는 법이지.


그리고 마침내 나는 오래 붙잡고 있던 방식과 완전히 결별하는 순간에 도달하였네. 어떤 말도 어떤 의지도 그 마지막 장면을 되돌릴 수는 없었지. 이전의 나를 떠받치던 믿음, 버티는 태도, 고집스러웠던 자의식이 조용히 무너져 내렸네. 나는 그 잔해 위에 앉아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네. 그러나 그대여,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에서는 아주 작은 새벽빛이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어. 오래된 내가 사라진 그 자리에서 말일세.





삶이 견딜 수 없는 순간에야 비로소 진실이 드러난다.

변화는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으며

더는 붙잡을 수 없는 삶을 떠날 때 시작된다.


{동해} 빈자리 위의 충만을 붙잡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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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