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니 Jul 02. 2024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돈암동 어느 골목길 파란 대문 안에 지하로 내려가는 콘크리트 계단이 있다. 계단은 크고 높았던 것 같은데 그게 실제로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어려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계단 밑에 있던 지하방에서 6살 무렵까지 살고 그 이후에는 한 번도 그곳에 가 볼 기회가 없어서 그 또한 알 수가 없다.

  나의 엄마는 그 집에 살 당시 기억을 몹시 끔찍하게 여겼다. 내가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엄마 말에 따르면 그 지하방 부엌에는 쥐가 들락거렸고 비가 오는 날이면 개털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고 했다. 여름 장마철이 되면 엄마는 주인집 마당에서 계단으로 흐르는 빗물이 현관으로 들어올까 봐 걱정했다. 실제로 물이 들어왔었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내리는 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장면이 나의 환상인지 실제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내가 물어봐도 엄마는 그때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며 이내 주제를 바꾸곤 했으니까. 여름에는 물난리, 겨울에는 너무 추워 화장실도 사용 못하는 그 집에서 우리는 4-5년 정도 살았다.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던 그 지하방이 엄마의 신혼집이었던 셈이다.

.

  하지만 엄마에게 미안하게도 어린 나는 그 집이 좋았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어디선가 눅눅하고 퀴퀴한 냄새가 확 끼쳐오는 것만 같다. 거실에서 배를 깔고 엎드려 선 따기라는 유치원 방학 숙제를 다 같이 하던 기억. 또 어느 날은 집이 정전되어 아빠가 서랍에서 기다란 양초를 가져오셨던 일. 우리는 다 같이 거실에 모여 은은하게 흔들리는 촛불을 봤던 것도 같다. 그리고 희미하게 기억나는 부엌의 구조.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던 화장실. 그리고 이사 가기 전날 다 같이 누워서 자는데 내가 떠나기 싫다며 눈물을 흘렸던 일이 그 집에서의 마지막 기억이다. 엄마에게 끔찍했던 그 집이 나에게는 아주 따스하고 포근하게 기억되다니 참 우습지 않은가. 아이에게 집이란 넓은지 좁은지 지하든지 고층이든지 상관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대궐 같은 집에서도 불행할 수 있고 단칸방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 공간을 채우는 것은 기억이다.


  후에 우리 가족은 작은 주공 아파트로 이사했고 거기서 나는 대부분의 학창 시절을 보냈다. 나의 엄마는 그 집이 첫 집이라며 꽤 많은 애착을 가졌었던 게 생각난다. 엄마가 거실을 깨끗하게 쓸고 닦던 모습, 식물을 키우던 모습, 해가 좋은 날에는 베란다에 이불을 펴서 말리던 기억. 파키아 나무라든가 뜬금없이 고급스러운 난 화분들이 있었고 또 잘 다려진 식탁보, 옥색 쌀통 같은 것들이 기억난다. 엄마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작은 장식품들을 집안 곳곳에 달았다. 시계 밑에 산타 할아버지, 식탁 전등에 빨간 리본. 크리스마스트리는 없었다. 그녀에게 허락된 행복이란 그저 작은 소품을 달면서 기분을 내는 것이 전부였다. 이제사 생각해 보면 엄마는 그때 젊었고 지하방에서 벗어나 한 줌의 햇볕을 쬐며 조금은 행복했을 것이다. 나는 안방 책장에 있던 아빠의 동전그릇에서 500원짜리들만 골라 훔치기도 했고 엄마가 쌀통에 숨겨놓은 과자들을 찾아서 몰래 먹기도 했다. 또 다른 책장 안에 주인을 모를 작은 인형들을 구경하고 일본에서 발행된 인테리어 잡지들(식물을 활용한 집 꾸미기 방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었다), 계란을 활용한 요리책, 지점토 인형 만들기 책자를 뒤적이는 걸 좋아했다. 엄마는 한 번도 지점토 인형을 만든 적이 없었는데 누구의 책이었을까? 엄마도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걸 그때 나는 몰랐다.


  나는 대학교 2학년 때쯤 그 주공아파트를 떠나 두어 번 더 이사를 했고 더 크고 좋은 새 집이었지만 그 집들과 딱히 추억은 없다. 나의 20대는 유난히도 힘들었는데 그 속에서 새로운 집들은 딱히 쉼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떠났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 생각난다.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떠나고 싶은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나는 이 말에 깊이 공감했다. 십 년 전 내가 한국을 떠날 때 나는 확실히 불행했다. 사랑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공항에서 나를 배웅하는 엄마는 잠깐의 이별이라 생각했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막연히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긴 이별의 시작일 것을.




  나는 미국에서 그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첫 신혼집은 작은 아파트였다. 렌트였고 다달이 월세를 내며 살았다. 우리 둘은 여행과 캠핑을 좋아했는데 4-5시간 운전해서 멀리 갔다 돌아올 때면 나는 늘 마음이 이상했다. 차창 밖으로 익숙한 동네 풍경을 보며 이제 다 왔다는 안도감도 느끼고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긴 했지만 '우리 집'에 다 왔다는 말이 선뜻 나오질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집'과 '우리 집'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했던 것이다. 나는 지금 그곳에 살고 좋은 추억도 많이 만들었는데 그 아파트를 우리 집이라 부를 때마다 나의 마음에서는 큰 저항이 일었다. 이곳을 우리 집이라 불러도 되나, 아니 내가 그렇게 부르고 싶은가? 글쎄. 그렇다면 한국에 엄마아빠가 사시는 집이 내 집인가. 아니다 그곳도 나의 집이 아니다. 어디에도 내 집이라 느껴지는 곳이 없었다. 진정으로 집이라 부를만한 곳이 없다는 것은 둥둥 떠다니는 것과도 같았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흔들리고 파도가 치면 치는 대로 휩쓸리는 뿌리 없는 나무인 것이다. 그래서 가끔씩, 아니 자주 그 돈암동의 지하방을 떠올렸다. 그리고 작은 주공아파트를 떠올렸다. 눈을 감고 그 집을 떠올리면 그곳에 누워있는 것 같았다.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은 그런 곳이어야 했다. 가슴이 찌릿찌릿하면서 코 끝에 따뜻하고 오래된 냄새가 떠도는 것 같은 느낌.


  곧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며 우리는 이사를 준비했다. 몇 년간 열심히 모은 돈에 여기저기서 조금씩 융통한 돈을 합쳐 이 집 저 집 알아보고 다녔는데 아무리 열심히 찾아도 마음에 드는 집이 없었다. 나는 첫 집을 고르는 과정이 좀 더 전문적이고 냉철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새로 지은 집, 깨끗한 내부, 잘 꾸며진 인테리어를 봐도 그저 그랬다. 이곳에서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몇 개의 집을 흘려보냈다. 이 집을 보러 왔을 때 나는 왠지 모르게 설렜다. 들어가자마자 탁 트인 높은 천장에 적당한 뒷마당, 커다란 창문이 있는 주방, 아기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부동산 중개인 말로는 경쟁자가 많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왠지 모를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집주인은 우리를 선택해 주었다.

  계약이 끝나고 열쇠를 넘겨받은 나와 남편은 한밤중에 아기와 함께 깜깜한 도로를 달려 새 집으로 향했다. 낯선 땅의 여름은 낮에는 찌는 듯이 더웠지만 밤에는 서늘했다. 시원한 밤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새 동네는 조용했다. 딸깍. 열쇠를 돌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의 가슴은 무한히 콩닥거렸다. 바구니 카시트에 누운 아기는 편안한 표정으로 잠을 자고 있었다. 아직도 그 밤의 공기를 잊지 못한다.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머나먼 이국땅에 처음으로 마련한 우리의 보금자리였다. 렌트를 전전한 까닭에 변변한 가구 하나 없다는 걸 이 집에 이사 와서 알았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이 집에 이사 오고 아이는 첫 뒤집기를 하고 꼬물꼬물 기고 아장아장 첫 발을 떼고 엄마를 말했다. 아이가 건강하게 잘 크는 것도 마침내 어딘가에 마음 붙이고 살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이 집이 나에게 준 행운이라 여겼다. 당연한 일상도 행운처럼 느껴졌다. 나는 더 이상 부유하지 않고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 같았다.

  이 집에 이사 오고 1년쯤 되었을까. 남편이 타주에서 직장 제의가 들어와 우리는 고민을 했었더랬다. 그는 새로운 기회가 될 것 같다고 은근히 가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새 회사에서는 이주비도 넉넉히 주고 연봉도 원하는 대로 얼추 맞춰주고 무엇보다 지금 살고 있는 곳 보다 집 값도 생활비도 저렴하다고 했다. 남편과의 전화통화를 끝내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놀랐다. 오랜 시간 찾아 헤맨 행복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일상이었다. 하루하루였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추억이었다. 마침내 '우리 집'이라 부를 곳을 다시 갖게 된 것이다. 나는 코 끝에 은은하게 맴도는 눈물의 냄새를 맡으며 아기의 이마에 내 이마를 맞대고 소리 내어 말했다. 떠나고 싶지 않아. 지금 정말 행복해.

작가의 이전글 특이한 이름, 평범한 삶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