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김기현 신임 대표 체제가 들어섰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통 큰 지원 덕분에 집권여당 수장에 오른 김 대표는 취임 뒤 용산 대통령실의 강한 자장에 끌려 다닐 것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았습니다. 실제로 김 대표의 첫 작품인 주요 당직 인선도 ‘감독’의 의중이 반영됐다기보다 ‘구단주’ 윤 대통령이 적어준 ‘타순’을 그대로 따른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김기현 대표는 전당대회 승리 직후 취임 일성으로 ‘연포탕’(연대 포용 탕평)을 강조했습니다. 최고위원과 청년최고위원까지 ‘친윤계’가 싹쓸이를 하면서 여당 사상 전례 없는 단색 지도부가 출범하는 데 따른 비판을 의식한 것입니다. 그래서 당 일각에서는 “김 대표가 아무리 윤 대통령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여있다고 해도 4선 정치경력에다 명색이 집권여당 대표인데 자신이 공언한 대로 주요 당직자 일부를 비주류에 배려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자 주요당직 인선에 ‘김기현’의 이름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 지도부는 “대통합 모양에 맞는 인물 선정”이라고 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임명된 주요 당직자는 모두 윤석열 대통령과 인연이 있거나 깊은 교감을 나눈 인사들로만 짜였습니다. 지역적으로는 영남권 인사들이 다수 전진 배치돼 지역안배도 없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가장 비주류 안배가 유력시됐던 지명직 최고위원에는 강대식 국회의원(초선, 대구 동구을)이 임명됐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친윤계’ 싹쓸이 비판을 피하기 위한 ‘구색 맞추기’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강 의원은 당내 몇 안 되는 ‘유승민계’로 분류됐지만 지난 1월 신원식 의원 등과 함께 나경원 전 의원을 규탄하는 초선 공동성명에 이름을 올려 ‘탈 유승민계’를 선언했다는 말이 나온 바 있습니다.
애초 지명직 최고위원 자리에는 ‘유승민계’ 중진인 유의동 의원이 유력했으나 유 의원이 고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때문에 유일하게 비주류 목소리를 낼만한 인물을 고르다 그나마 ‘친윤계’와 입장이 잘 맞는 편인 강 의원을 골라 구색만 맞췄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특히 강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인 대구 동구을에 비례대표 조명희 의원이 도전장을 낸 상태라 재선 확정을 위한 공천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강 의원이 당 지도부에서 ‘비주류’의 입장을 대변하기는 더욱 쉽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내년 총선을 총괄할 사무총장은 예상한 대로 이철규 의원(재선, 강원 동해·태백·삼척·정선군)이 임명됐습니다. 그는 장제원 권성동 의원과 함께 ‘찐 윤핵관’으로 분류되는 인물입니다. 윤 대통령이 지난해 이준석 전 대표 징계를 두고 싸울 때 맨 앞에 서서 몸으로 ‘대리전’을 이끌었던 공을 인정받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당 안팎에서는 이철규 사무총장 임명으로 당은 사실상 윤 대통령이 장악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특히 윤 대통령이 공천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 김 대표를 거치지 않고 ‘심복’ 이철규 사무총장과 ‘직통라인’으로 직접 거래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김기현 대표는 용산 대통령실과 이철규 사무총장 사이에 붕 뜬 사실상의 ‘허수아비’로 전락할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용산 대통령실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직이 바로 사무총장이었습니다. 당 대표는 상징적인 자리이기 때문에 대통령실이 직접 컨트롤할 경우 눈에 띄기도 쉬어 부담스러운 관계입니다. 하지만 사무총장은 상대적으로 실무적인 자리인 데다 재선을 임명해 대통령의 ‘직접 컨트롤’ 부담을 줄였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더구나 이 사무총장은 장제원 의원이 실질적 리더를 맡고 있는 ‘친윤계’ 공부모임 국민공감의 총괄간사를 맡고 있어 장 의원의 ‘직속라인’으로 분류됩니다. 결국 국민의힘은 김기현 대표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윤석열-장제원’ 조합으로 내년 총선을 돌파할 전략을 짠 것이 이번 당직 인선에서 공식 확인이 된 셈입니다.
전략기획부총장은 박성민 의원(초선, 울산 중구)에게 돌아갔고 배현진 의원(초선, 서울 송파구을)은 조직부총장을 맡게 됐습니다. 박성민 의원은 초선인데 강성 ‘친윤계’로 분류되는 인물이고, 배현진 의원은 나경원 전 의원의 전당대회 출마를 주저앉히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연판장’ 이슈를 주도해 당 요직에 임명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배 의원은 애초 홍준표 의원계로 분류됐지만 대선을 거치면서 ‘친윤계’로 배를 갈아타 초선 여성임에도 조직부총장이라는 중요한 자리를 꿰차는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수석대변인 자리에는 유상범(초선, 강원 홍천·횡성·영월·평창군), 강민국(초선, 경남 진주시을) 의원이 같이 임명됐습니다. 수석대변인 가운데 유상범 의원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과 당의 ‘가교’ 역할을 하는 데 있어서 검찰의 입장을 반영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배우 유오성의 형이기도 한 유상범 의원은 윤 대통령이 아끼는 알짜 ‘친윤계’로 분류됩니다.
그는 윤 대통령 서울대 법대 후배로서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수2부에서 ‘선배’ 윤 대통령과 함께 손발을 맞췄습니다. 사법연수원 21기인 유 의원은 23기인 윤 대통령보다 기수는 위지만, 사석에서는 대통령을 ‘형’이라고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라고 합니다. 특히 유 의원은 윤 대통령처럼 특수부 검사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한 케이스입니다. 때문에 윤 대통령과 ‘정치적 코드’가 잘 맞고 검찰 입장을 중시하면서 당의 대변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옵니다.
또한 유 의원은 지난 2년 동안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법 강행, 한동훈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회 등 첨예한 여야 대립의 최전선에서 싸운 경력도 있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중요한 역할을 할, 윤 대통령의 또 다른 ‘히든카드’로 분류됩니다.
그리고 이번 당직 인선의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이준석 전 대표와 공개적으로 맞서 싸운 인물들이 중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철규 의원과 함께 유상범 의원도 지난해 이 전 대표 징계안 정국에서 여러 차례 이 전 대표와 설전을 벌이며 ‘윤핵관’의 입지를 확실히 다졌고 이후 윤 대통령의 눈도장을 받았다는 해석도 나옵니다.
이렇듯 국민의힘 김기현 체제는 단 한 사람의 비주류를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윤석열 단색’의 지도부가 됐습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윤 대통령이 거추장스러운 비주류를 없앴다고 해서 당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거대한 착각”이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총선에서 반드시 당선돼야 하는 국민의힘 존재 이유를 볼 때 윤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져 당선 가능선이 희박해지면 김기현 단색 지도부는 오히려 더 쉽게 와해될 가능성이 큽니다. ‘정치적 가치’로 뭉친 팀이 아니라 윤 대통령의 일방적 지시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이 위기에 몰려 대통령의 힘이 빠지면 당 지도부가 가장 먼저 탈출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친윤계’ 일색의 ‘윤석열 직할체제’로 당 지도부가 꾸려지면서 향후 모든 정치적 책임은 윤 대통령 1인에게로 직하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비주류를 일부라도 등용했다면 윤 대통령 개인에게로 쏠리는 정치적 하중과 리스크를 분산시킬 수도 있었지만 윤 대통령은 당의 다양성과 확장성을 포기해버렸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모 아니면 도’의 베팅을 해 성공했던 윤석열 대통령의 또 다른 ‘도박 게임’이 시작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