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이야기입니다. 모 대권주자 캠프의 막후 전략가로 통했던 A씨는 공식 직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소위 말하는 ‘비선 라인’쯤 되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정국을 읽는 감각이 뛰어났고 전략기획 아이디어가 풍부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루는 그의 생일이라고 해서 인사동 어느 식당으로 오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휴일에 별생각 없이 나간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보고 속으로 적잖이 놀랐습니다. 그곳에는 당시 그 대선후보를 담당하던 주요 방송·일간지의 1진 기자들이 수십 명 앉아 있었습니다. 기자들을, 그것도 ‘막강한 1진’들을 휴일에 그렇게 한자리에 불러 모을 수 있었던 그의 ‘파워’에 한번 놀랐습니다.
그리고 참석한 기자들끼리 너무도 격의 없이 오래된 친구처럼 대하며 A씨와 ‘우리 편 잘해 보자’며 어깨동무를 하는 파이팅 분위기에 두 번째 놀랐습니다. 물론 출입처가 같으면 대부분 동료 의식이 깊어져 상당히 친해질 수밖에 없긴 합니다만 참석자들끼리의 묘한 ‘일체감’도 느꼈습니다.
사실 그 전략가의 생일파티는 단순히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자리의 의미 그 이상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우호적인 매체와 소속 기자들만 당연히 ‘선별’ 초대했을 것이고 그렇게 형성된 언론과 정치의 ‘유대 관계’는 모여서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는 것 이상의 강력한 ‘하모니’를 생산해 내는 걸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정치인들은 ‘출입처 기자’들을 포섭과 활용의 대상으로 여기고 더없는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언론 친화적인’ 정치인으로 인식됐습니다. 그가 지난 2021년 6월 29일 대권 도전을 선언한 뒤 다음 날 첫 공식 일정으로 찾은 곳은 국회 기자실이었습니다. 또한 대통령 취임 직후 매일 기자들을 만나는 ‘도어스테핑’을 할 만큼 ‘언론에 진심이다’는 평가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취임 1년이 지나고 보니 윤 대통령의 언론관이 기자들을 ‘내 편’으로 만드는 ‘포섭’의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또한 ‘대통령의 이야기’를 ‘제대로’ 써주지 않는 언론에 대해 일종의 피해의식도 느끼는지 기자들과의 ‘접촉’에 상당히 민감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윤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21일부로 도어스테핑 발길을 끊었습니다. 중요한 국정 이슈에 대한 소통은 언론과의 정상적인 프로세스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국무회의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는 ‘일방통행’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윤 대통령은 몇몇 주요 외신들과만 인터뷰할 만큼 국내 언론을 불신하고 있다는 지적도 받고 있습니다. ‘바이든-날리면’ 사태 이후 윤 대통령은 국내 언론에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극도로 ‘입조심’을 하고 있거나 아예 무시하는 전략으로 일관하는 듯합니다.
그런 윤 대통령이 지난 5월 2일 용산 어린이정원에서 대통령실 기자단과 깜짝 만남을 가졌다고 합니다. 대통령실 앞마당인 파인그라스에서 참모진과 기자들이 오찬을 하던 중 윤 대통령이 예고 없이 갑자기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취임 1주년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대통령이 자처했다고 합니다. 이날 공개된 윤 대통령의 발언과 사진들을 보면 상당히 분위기가 훈훈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윤 대통령과 기자단의 ‘갑작스러운’ 화기애애 장면을 보면서 적잖이 당혹스러웠습니다. 지난해 11월 도어스테핑이 중단된 이후 대통령과 기자단이 공식적으로 만날 시간은 거의 없었습니다. ‘바이든-날리면’ 사건으로 MBC 기자가 전용기 탑승을 거부당하고 기자와 대통령실 참모 간의 설전이 있은 뒤부터 윤 대통령과 기자단 사이에서는 해소되지 않는 긴장 관계가 지속됐습니다.
하지만 기자단과의 깜짝 만남에서 윤 대통령은 언제 그랬냐는 듯 취임 초 ‘김치찌개를 끓여 기자들에게 대접하겠다’는 말을 상기하며 “인원을 조금씩 나눠 자리를 한번 (만들자). 인원이 적어야 김치찌개도 끓이고 하지 않겠나”라고 농을 던지며 분위기를 돋우었다고 합니다.
잠시 언론과의 긴장 관계를 풀고 취임 1년을 맞아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했던 발언이라고 십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그동안 언론과의 소통을 철저히 무시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메시지만 일방적으로 발신했습니다. 그러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기자단 전체와 깜짝 미팅을 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미국 방문에서 보여준 ‘아메리칸 파이’와 ‘유창한’ 영어 연설 퍼포먼스에 스스로 고무되었던지 기자단 만남에서 시종일관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였다는 후문입니다. 그러면서 기자들과 자주 만날 기회를 갖겠다고 덧붙였습니다. 마치 셀럽이 시간을 내서 팬들과 자주 만나주겠다는 듯 다분히 시혜성 발언으로 들립니다.
정치권에서는 윤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도 따로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이 많습니다. 대통령의 기자회견이나 인터뷰는 본인의 호·불호에 따라 결정되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에게 국정 상황을 소상히 보고하는 책임과 의무 이행의 과정입니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은 평소에는 언론을 멀리하다가 기분이 내키면 갑자기 기자들 모임을 찾는 이중적이고 즉흥적인 언론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26년 동안 검사로 재직하며 누구보다 ‘기자’들의 생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수십 년 보아온 ‘법조 출입 기자’들을 통해 자신의 언론관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법조 출입 기자들은 그 어떤 출입처보다 취재원(검사)의 비위를 맞춰주어야 하는 ‘갑을 관행’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특히 법조 출입 기자들은 검사가 수사 기밀을 독점하면서 생긴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에 유독 취재원(주로 검사)과의 관계 설정에 애로를 겪습니다. 정보에 목이 마른 법조 출입 기자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검사들에게 줄을 대 작은 ‘빨대’라도 꽂는 걸 특종의 지름길이라고 여깁니다. 회사에서도 은근히 검사와의 친분 정도를 기자의 유능함 척도로 여기기도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보 공급에 있어서 철저히 갑의 위치에 있는 검사들은 기자들을 자신의 수사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노골적인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일부 기자들은 ‘한 건’을 위해서 검사들의 비위를 맞춰주고 그들의 ‘술친구’로 전락해 얻은 정보로 ‘연명’하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검사들이 기자들을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분이 좋으면 기자들에게 ‘한번 만나 주겠다’고 크게 선심을 쓰는 것처럼 떠벌리기도 할 것입니다. 이는 취재원과 기자 간의 ‘종속관계’를 오랫동안 경험해 온 윤 대통령의 언론관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대통령과 기자의 관계성은 대통령이 기분이 좋아서 김치찌개를 맛있게 끓여주거나 한턱 내주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정례적인 언론 대면을 통해 국가 운영의 과정을 투명하게 보고하고 기자들은 대통령이 불편해할 만한 질문도 거리낌 없이 던져야 하기에 양측은 ‘상시적 긴장 상태’에 놓여있어야 정상입니다.
이런 점에서 윤 대통령과 용산 기자단의 웃음꽃은 생뚱맞은 그들만의 ‘파티’로 비쳐집니다. 기자들은 대통령이 ‘파티’에 갑자기 참석해 ‘친목회’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윤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도 하지 않은 채 어물쩍 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기자단과의 깜짝 만남은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모습만 보여주려는 ‘셀럽의 이미지 메이킹’으로만 비칩니다.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이 퇴임 직전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남긴 말은 대통령이 기자를 대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일하는 것이 즐거웠다. 물론 여러분이 발행한 기사를 다 좋아했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관계의 핵심이다. 아첨꾼은 기자의 역할이 아니다. 제게 어려운 질문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기자는 엄청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칭찬하기보다는 냉철한 시각으로 봐야 하는 역할이다. 우리를 뽑아준 사람에게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직업이다. 여러분은 그 일을 해냈다.”
윤석열 대통령은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단골 메뉴 ‘김치찌개’를 언급하며 그들이 자신을 향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기자들에게 인기 있는 대통령이 되려면 김치찌개보다 국정 주요 현안에 대해 솔직하고 겸손하게 답변하는 자세를 임기 동안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윤 대통령이 언론을 국민과의 소통 창구가 아니라 ‘정권의 나팔수’로만 인식하며 공급자 마인드에 빠져 있다면 제대로 된 국정철학 홍보도 더욱 요원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