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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ri Sep 04. 2022

무엇이 그녀를 죽음과 친해지게 만들었을까<실비아 살다>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이라는 녀석




그녀의 삶처럼 짧게 끝나버린 실비아, 살다.


미국에서 유명한 지 모르나 이 극으로 처음 실존인물이라는 걸 알게된 실비아 플라스, 그리고 빅토리아 루카스.

이야기만 들어보면 꽤 먼 이야기인듯 하지만 사실 1950년 영국과 미국,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이다. 

자신의 예술성보다 사회적 역할이 더 중요해야만 했던 그녀의 삶 가운데 가장 생동감있게, 가장 자유롭게 느껴진 것이 어쩌면 죽음이라는 게 아닐까 싶다. 

30여년의 삶을 살면서 10년에 한번씩 주기적으로 찾아온 그녀의 자살. 아버지의 죽음으로 작가 본인에게 9살 부터 죽음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 그녀의 시간 속에서 죽음은 피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어쩌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의 하나로 남았는지 모르겠다. 

부모의 죽음은 생각보다 큰 두려움을 자식들에게 남긴다고들 한다. 부모의 사망 나이를 넘길때 즘, 자식에게는 그 언저리를 큰 스트레스를 겪는다고 한다. 이는 아버지의 형제들에게 서도 다른 시간, 다른 방법으로 듣게 되서 놀라게 된 실제 경험이다. 아버지와 삼촌들은 정작 서로에게는 그 말을 하지 못한 채, 막내 삼촌이 그 나이를 지나 무심결에 털어놓았던 날 봇물같이 터져나왔다. 

부모의 죽음은 묻어 논다 생각하여도 어딘가에서 막힌 댐 처럼 터질 준비를 하고 있는가 보다.


실비아 플라스에게는 그런 죽음과 예민한 감성, 여성으로 처한 부자유스러운 상황, 매끄럽고 다듬어 진 것 만을 허용하는 예술계, 그리고 그 어떠한 것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좌절감과 죄책감이 그녀의 작품을 형성해 왔던것 같다



(스포 있음)


그녀의 필명인 빅토리아가 그녀의 또 다른 인격으로 나타나 실비아를 위로하고 끌어당겨 주지만, 결국 그녀의 마지막 자살은 막지 못했고 실비아는 결국 단막극 같이 짧은 생애가 끝나버렸다.

빅토리아는 끊임없이 실비아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실비아는 그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빅토리아의 존재는 작가가 극 중 실비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실비아들에게 '너희의 탓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실비아 대신 화내고, 울고, 소리지르고, 감탄해 주는.



하지만, 성인에서의 우울함은 거지같은 그녀의 남편때문이 아닐 수 없다. 변명의 여지도 없다고 생각한다.

들을수록 홧병과 뒷목 땡김이 더블로 오는 그녀의 남편 테드 휴즈. 살아서도 죽어서도 갈아버려도 시원찮을 그에 대해 나만 화난 것은 아니었는지 실비아의 팬들도 그녀의 비석에 휴즈를 없애버렸다고 하니 오죽했으랴 한다. 

서로 예술가로 만났음에도 자신의 작품을 위해 모든 생활을 실비아에게 떠맡긴 채, 자신은 온전한 '예술인'으로만 남으려고 한 그의 철면피에 무대 위 배우임에도 정말 싸대기를 날려버리고 싶은 이 심정....

게다가 마지막 그 장면 정말..... 거꾸로 매다 꽂아 버리고 싶던 이 마음....

캐릭터가 너무 발암캐라 커튼콜때 배우님에게 박수를 칠 수가 없었다. 

실비아 이후에 바람핀 여자까지 자살한걸로 보아 그냥 휴즈가 역병이었다는게 나의 확신이다.





이아름솔 배우 이름을 보고 홀린 듯 예매한 공연이었고, 공연이 완벽했냐고 묻는다면 조금은 더 채워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하지만 관객이 상상의 나래를 펼칠 만큼의 시놉은 채워주었기 때문에 보고 난 다음이 더 진한 기억이 남는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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