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안 Apr 05. 2022

감정일기를 권합니다.

저에게 글쓰기는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은 일 중 하나였어요. 글 쓰는 일이 몹시 지루하게 느껴졌거든요. 글을 쓰기 시작하면 금방 산만해져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웹 서핑의 세계에 빠지곤 했죠. 한 단락을 완성하는데도 어마어마한 공을 쌓아야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육아 스트레스가 많아 엄마로서의 무능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친구에게, 그리고 최근들어 우울한 감정과 씨름하는 동생에게 감정 일기를 써보라고 권하고 있네요.



저 역시 감정적으로 금방 소진되고 또 쉽게 불안정해지곤 했던 사람이라 매일 저녁 표정이 다르고 정서 상태가 바뀌었어요. 어느 날 기도하기조차 힘들어 기도하듯 글을 썼는데, 쓰면서 심란하고 요동쳤던 마음이 잔잔해지고 이대로도 괜찮다는 혹은 괜찮아질거라는 따뜻한 희망 같은 게 생기는 게 아니겠어요.



글쓰기의 마법에 매료된 건 그때부터였어요.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던 감정을 알아차리고 그 감정이 어떤 욕구에서 비롯되는지까지 깨달을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담과도 닮았더라고요. 실제로 글쓰기로 치료를 하는 상담 기법도 있고, 자신의 깊은 감정을 꾸준히 쓴 사람은 불안이나 우울과 같은 정서 문제가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도 있답니다. 





노하우까지는 아니지만 감정일기를 어떻게 쓰고 있는지 소개해드릴까 해요. 제가 생각하는 감정 일기의 가장 큰 전제는, '마음이 지치고 힘들다면, 분명히 그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빨리 결정해야 하는데 미뤄둔 일이 있다거나, 상대의 말투가 묘하게 무시하는 듯했다거나, 말실수를 한 것 같아 후회된다거나, 어려운 분과 만날 약속을 앞두고 있다거나 하는 일들이요.



하지만 그 이유란 것은 쉽게 떠오르지 않아요. 그래서 일단은 '지금 왜 이렇게 힘들지’, '아, 기운 없다’, '짜증이 난다’ 같은 정제되지 않은 문장으로 툭 내뱉듯 시작해요. 그리고 오늘 하루를 비디오테이프 되감듯 아침부터 지금까지의 나를 쭉 스캔해봐요. 그러다 보면 툭, 하고 걸리는 순간이 있어요. 마음이 쨍 시려오는 순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빨리 감기 해버리고 싶은 순간이요. 겨우 용기 내서 한 부탁을 상대가 거절한 순간, 아이들에게 버럭 화를 낸 순간, 실망하는 상사의 표정을 본 순간, 영어를 못 알아들어 엉뚱한 대답을 했던 순간은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도망가고 싶어져요. 심호흡을 하고 그 순간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사실 마주하기 힘들수록 가만히 들여다보기가 힘들어요. 저는 특히 엄마와 관련된 일일 경우 이를 다루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글을 씁니다. '오늘 오후의 일이었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초등학생 때 많이 했던 육하원칙 하에 일기를 쓰는 것처럼요.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드라마 시나리오 쓰듯 최대한 그 상황을 구체적으로 씁니다. 그리고 사이사이에 상대의 감정을 추측해 집어넣습니다. '동생네에 머물고 계신 엄마가 오늘 집에 내려가고 싶다고 했다. 엄마가 동생네에 있기 불편할 만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다음 제 마음과 연결 지어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엄마가 속상한 일이 있다고 하면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복잡해지는 걸까’ 이 때부터 객관적 상황 이면의 제 감정에 닿기 시작해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감정이 생기는 이유를 살펴봐요. '예전에도 엄마가 아빠 때문에 속상하다고 할 때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같은, 비슷한 감정이 생겼던 다른 경험을 적어보거나, ‘고생하신 엄마의 노후는 시름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나 보다’, '나는 엄마를 아이처럼 보호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같은 그 감정이 들게 한 저의 기대나 바람을 추측해보기도 해요. 정답은 없어요. 적었을 때 마음이 가벼워지고 시원해지는 문장이 있다면 그게 내 마음에 가까운 욕구일 거예요. 좀 더 나아간다면, 나의 욕구를 제삼자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집요하리만큼 구체적으로 질문해 보는 거예요. '엄마는 과연 평생 고생만 하신 분인가’, ‘시름없이 행복하다는 건 어떤 걸까. 그리고 그게 가능한 건가’, '엄마를 보호한다는 건 어떻게 한다는 거지? 엄마가 보호받으면 나는, 엄마는 행복할까’. 이런 질문을 무턱대고 던지고 나서, 서술형 시험 문제를 받아든 심정으로 정성을 다해 답안을 써봅니다.



마음에 닻을 내리고 성실하게 써 내려간 만큼 내가 외면하고 싶었던 내 감정과 욕구에 좀 더 진실해지고, 또 그만큼 내 마음은 가벼워지고 정돈됩니다. 완결하지 않아도 괜찮고, 다음 날 이어 적어도 좋아요. 그렇게 조금씩 나를 사로잡는 감정에서 자유로워지는 연습을 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 글은 제가 공저자로 참여한 나를 돌보는 다정한 시간(우디앤마마)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Pseudo-ADHD의 고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