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너를 담고 나를 느끼러 간다.

123일간의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보따리

by 이영훈



24살.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한민국 남자.

21개월 간의 군 복무 후 복학생 아저씨를 바라보는 휴학생이자 백수 신분.

나를 설명할 수 있는 타이틀이 고작 그 정도였다.



특별히 크게 하고 싶은 것도 아주 잘하는 것도 없던 나.

이대로 복학하면 눈 앞에 당장 닥칠 현실이 싫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떠올리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은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던 배낭여행.

왜냐고? 나는 여행을 좋아하니까.


에콰도르 바뇨스 세상의 끝 그네


사실 지금껏 여행을 제대로 해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여행이 좋아서 관광경영학과로 진학을 했고

자전거를 타고 전국일주를 한 경험도 있다.

그리고 혼자 배낭여행을 떠날 거라고 항상 생각했었다.

덕분에 나만의 여행을 가기로 결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짧고 깊은 고민을 통해 결정했다.

떠나기로.



나도 남들처럼 멋지게 나만의 테마를 잡고 여행을 다녀오고 싶었다.

누구는 그림일기를 그리고,

누구는 사람들의 꿈을 물어보고,

누군가는 엄마와 여행을 다니고,

누구는 한국을 알리기 위해 여행을 했다.

나도 나만의 테마로 멋지게 세계를 누비고 와서

당연하다는 듯이 유명해지고 강연도 하고 책도 내며 살고 싶었다.

사실 정말 그러고 싶다기보다는

당장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즉 현실도피였다.

어쨌든 이건 내가 떠나고자 한 솔직한 이유다.

일단 배낭여행을 가보고 싶었고, 더 이상 내 앞의 현실은 싫었다.


세계 5대 미봉이라 불리는 피츠로이의 일출 앞에서 태극기와 함께


유럽, 동남아, 호주, 뉴질랜드 등등 다양한 곳을 갈 수 있었지만

나는 초지일관이었다. 남미.

물론 처음부터 남미를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당연히 유럽이었고 배낭여행은 유럽으로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남미도 내가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순간부터 계속 남미였다.

물론 한 번에 세계일주를 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은 나를 시험해보고 나의 테마가 뭔지 알고 싶었다.

나의 테마도 나 자신도 잘 모르면서 멋있어 보인다고 따라 하다가는 온전한 내 여행을 즐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나의 도전을 가로막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소매치기와 강도를 비롯한 각종 치안, 지카 바이러스, 스페인어의 장벽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날 수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가고 싶었으니까.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으니까.

그곳에서 마주할 수많은 인연과 에피소드, 풍경들, 새로운 나의 모습이 너무 궁금했다.



나도 여행을 망설일 때가 분명히 있었지만

일단 비행기표를 결제하고 나니 알아서 몸이 움직였던 기억이 있다.

여권을 재발급하고 황열병 예방접종을 맞고 준비물을 사고 배낭을 구매하러 발품 팔고.

그렇게 나는 떠났다.



잉카 문명의 흔적을 찾으러 산을 오르고,

다양한 인종이 하나 되어 즐기는 삼바축제에 내 몸을 맡기고,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이라는 우유니에서 지는 석양을 보고,

자연 속에서 캠핑하며 밤에 누워 노래를 들으며 별똥별에게 소원을 빌고.

그런 행복을 담으러 갔다.

또 그런 경험들 속에서 나를 깊게 느끼러 갔다.






시작은 이러했다.

물론 여행을 다녀온 지금 이 시점.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물론 여행을 떠났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예전에 내 생각이 잘못됐다고 알게 된 것도 결국 여행을 갔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많이 성장했다.

내가 여행을 미친 듯이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여행이 가져다주는 수많은 따듯함을 느끼기 위해

계속 여행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또한 이번 남미 배낭여행은 내 여행의 시작도 끝도 아니다.

앞으로도 여행하는 삶을 살 것이고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노숙해도 마냥 즐거웠던 산티아고 공항에서의 어느 날



나의 테마를 찾기 위한 여행.

평소엔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을 차근차근 느끼고 담으며 느린 생각을 하는 여행.

나와의 깊은 대화를 위해 일기를 꾸준히 쓰는 여행.


그리고 그런 여행을 통해 나는 어떻게 변했는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배웠는지.

길 위에서 마주친 수많은 순간들과 감정들을,

내 생각들을 이제부터 차곡차곡 담아보려 한다.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4개월 남짓의 기록.

평생 철들고 싶은 않은 몽상가의 투박하고 거칠지만 따뜻한 구석이 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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