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1 장혜영 -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안녕하세요. 이번달에도 어김없이 돌아온 수플레 영훈입니다. 코로나와 총선과 봄. 이 3가지 단어를 함께 경험하고 있는 요즘, 여러분은 어떤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나요? 저는 혼자만의 시간이 많아졌고, 매일 글을 쓰거나 글을 쓰기 위해 무언가를 보고 듣는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함께 글을 쓰는 친구들과 서로의 글을 메일로 전하다보면 눈 앞에 있어도 만지지 못하는 봄을 드문드문 느낄 수 있곤 해요. 그러면서 완전 무해한 봄을 머릿속에 상상해보죠. 상처도 차별도 아픔도 없는, 그래서 정말 존재할 수 있을까 싶은 세상의 봄이요. 오늘은 그런 봄을 잠시나마 그려보게 만드는 노래를 소개하려고 해요. 바로 장혜영의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AYK9IN9hP0c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임당하지않고 죽이지도않고서
굶어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수있을까
나이를 먹는 것은 두렵지않아
상냥함을 잃어가는 것이 두려울 뿐
모두가 다 그렇게 살고있다고
아무렇지않게 말하고싶지는않아
흐르는 시간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네
언젠가 정말 할머니가된다면
역시 할머니가됐을 니 손을 잡고서
우리가 좋아한 그 가게에 앉아
오늘 처음 이 별에 온 외계인들처럼 웃을거야
이 노래의 가사를 듣고 있자면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마음을 담은 일기,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시간을 넘어 보내는 편지를 읽는 느낌이 들어요. 모든 가사가 제 마음에 콕콕 박혔지만 그중에서도 계속 잔상이 남는 단어들이 있어요. '나이를 먹는 것은 두렵지않아 상냠함을 잃어가는 것이 두려울 뿐.' 노래를 만든 혜영님은 어떤 마음으로 이 가사를 꾹꾹 써내려갔을까 하면서.
오늘은 혜영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저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해볼까해요. 제가 혜영님을 처음 알게 된 건 '생각많은 둘째언니'라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인데요. '동성애를 반대하는 너에게'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왜 잘못되었는지 조목조목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며 그 모습을 닮고 싶어 구독 버튼을 눌렀던 기억이 나요.
혜영님에게는 중증 발달장애를 가진 동생분이 있는데, 어느날 동생이 가장 살기 괜찮은 곳이라 생각했던 시설 내에서 인권 침해를 당하고 개인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요. 그 뒤로 혜영님은 동생을 데리고 나와 발달 장애인과 발달 장애인의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유튜브나 독립영화 등을 통해 보여주고 있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설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없었던 혜영님의 동생 혜정님은, 탈시설을 한 뒤 언니의 도움 속에서 수많은 갈등을 겪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것을 배워나가요. 그러한 과정이 담긴 다큐멘터리 영화 <어른이 되면>에서 혜영님과 혜정님이 함께 공연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초대해 부르는 노래가 바로 이 노래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PoijVI_nNBg
저는 이 영화를 통해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던 장애인의 삶을 보게 되고, 장애인 가족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장애인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어요. 나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했던 세상이 장애인들에게는 얼마나 힘든 것인지, 사소한 일(이를테면 밥솥에 밥하기, 대중교통 타기) 하나를 하기 위해 얼마나 큰 마음을 먹고 수없이 많은 노력을 해야하는지, 장애인 관련 복지 시스템의 부족한 점은 무엇인지 등등. 그중에서도 가장 놀랍고도 무서웠던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도 모르게 차별할 수 있는 세상이구나 하는 것이였죠. 이런 것들을 몰라도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구나 하고.
그 때를 계기로 인권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 더 노력했던 것 같아요.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제 스스로 하고 있을 차별들이 싫어서 조금씩 공부하니까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여성, 성소수자 외에도 노인, 청소년, 장애인, 난민, 더 나아가 동물들까지 우리가 시간과 정성을 들여 귀를 기울여야하는 존재들이 있다는걸 점점 알게 되었죠. 박제, 병신, 저출산, 결정장애. 이런 단어들이 왜 누군가를 향한 혐오와 차별이 되는지 깨닫게 되자 말도 더 조심하게 되고, 시민모니터링단을 하며 미디어에서 나타나는 혐오광고가 얼마나 만연한지도 새삼 느끼게 되었죠. 최근에는 동물권과 자연 생태문제에도 관심이 생겨서 비건을 지향하기 시작했고요.
우리는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는 이상 약자들의 소리와 형태를 잘 느낄 수 없어요. 나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삶이 누군가에게는 힘들다는 것을 잘 감각하지 못하죠. 내가 겪는 차별은 크게 느껴지지만 남들이 겪는 차별은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고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도 해요. 누군가는 이런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보고 누구나 다 그렇게 힘들게 살아간다고 말해요. 그리고 예전보다 많이 좋아지지 않았냐고. 또 누군가에게는 아주 이상적인 모습만 그리는 제 모습이 나이브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삶이 송두리째 왔다갔다하는 차별을 당하는걸 보게 되는 이상 눈 감고 못 본 척하는 것은 힘들 것 같아요. 차별이 얼마나 아픈건지 느껴봤으니까. 그들 모두가 또다른 나이고 내가 사랑하는 존재고 함께 살아갈 존재들이니까. 노래 가사처럼 그 누구도 해치지 않고 무사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수 있는 그런 삶을 여전히 소망해요.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요. 덜 아프고 덜 불편하고 덜 고민하고 모두가 푹 잘 수 있는. 혜영님은 이 노래를 두고 이렇게 말했어요.
"가끔 불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놓지는 않는다.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기에. 다만 생각에 잠긴다. 우리는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살아가고 싶다. 살아지거나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고 싶다고 혼자 중얼거리다가 가만히 잠든다. 누군가의 그런 밤에 함께 할 수 있는 음악이 되기를 바란다."
이 노래에서도 영화 속에서도 혜영님은 해피엔딩을 보여주지 않아요. 극적인 변주나 성장도 없어요. 태평한 마음으로 '다 잘될거야!'라고 섣불리 위로하지 않아요. 다만 그저 계속해서 고민하고 더불어가는 세상을 그려봐요. 노래와 영화가 끝난 뒤 현실의 삶은 계속되니까. 실제로 혜영님은 최근 그런 삶을 꿈꾸며 정치에 뛰어드셨고 이번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 되기도 했어요. 저는 혜영님이 아픔과 상처를 생산적으로 바꾸는 힘을 보며 용기를 얻었어요. 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또 한 번 마음먹게 해주었죠. 저 역시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상냥함을 잃지 않고 계속 나가아기. 나를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 상냥한 마음으로 상처입은 존재들을 오래오래 바라봐야 겠다고.
우리 모두 힘든 시기를 겪고 있어요. 코로나19로 인해 누군가는 취업을 못하고,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고 한국을 떠날 수 밖에 없게 되고, 누군가는 더 많은 육아를 짊어지게 되었고, 누군가는 먼 땅에서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폭행을 당하고, 누군가는 감염에 더 취약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죠. 차별은 언제나 있었고, 우리는 보이진 않지만 항상 존재하는 공기같은 차별에 많이 무뎌지기도 했어요. 지금 같은 시기에 그 차별이라는 벽은 더 단단해지고요. 하지만 모두가 그 벽을 응시하고 있고 깨부셔야겠다는 마음을 모은다면 언젠가 그 벽이 허물어질꺼라 믿고 싶어요. 각자가 벽을 더더욱 쌓는 것보다 모두가 벽 너머의 세상을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나중에 누구에게나 무해한 봄이 찾아오면 지구별에 처음 온 외계인들처럼 하하하 웃고 싶어요. 익숙하고도 새로운 우리의 세상에서. 오늘 밤만큼은 여러분이 슴슴한 기타 반주에 소망이 깊게 스며든 이 노래를 들으며 무해한 봄을 만끽하는 꿈 꾸셨으면 좋겠습니다.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네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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