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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올 Apr 15. 2020

기억을 걷는 시간

 ep.10 넬_기억을 걷는 시간

  안녕하세요. 읽고 쓰는 라디오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 수플레'의 셋째 주를 담당하는 JUDY입니다.

'벌써 4월이네요'라는 진부한 표현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네요. 정말로 벌써 4월이에요. 제가 상상했던 4월의 모습은 아니지만요. 아마 5월도 6월도 그리고 7월도 올해는 제가 상상하던 한 해는 아닐 거라는 것만 확실한 요즘입니다. 어쩌면 확실하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건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 이야기하잖아요. 확실한 것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 죽을 운명이라는 것 밖에는 없다고. 하지만 많은 것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아 보이는 건 우리 스스로가 그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제가 들고 온 4월의 노래는 넬의 <기억을 걷는 시간>입니다. 넬은 2001년 1집 앨범 [Reflection of]로 데뷔했던 4인조 그룹입니다. 반가운 분들이 계시죠?


https://youtu.be/K72 ZxP9 ZAP4

넬_기억을 걷는 시간


https://youtu.be/8 b26 XZ2_-Jw

유희열의 스케치북_넬_기억을 걷는 시간


  저는 사실 넬 특유의 몽환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런 감성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요. 이 기억을 걷는 시간만큼은 시작부터 항상 저를 사로잡는 것 같아요. 왜 그런 노래 있잖아요. 한 번 듣고는 아 이 노래다! 하고 빠져서 한동안 무한 반복해서 듣다가는 슬슬 잊어요. 잊다가 또 문득 어느 날 이 노래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들으면 또 빠져요. 그래서 또 무한 반복하다가는 슬슬 잊다가 또 어디서 들으면 또 아 맞다 하고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하는. 저에겐 바로 그런 곡입니다.




기억이란 제대로 이기적인 것


"우리 이때 너무 좋았다 그치 "


   며칠 전 친한 언니에게 카톡으로 사진 1장과 함께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 분명 그 사진 속 언니 옆에는 내가 있는데 입고 있었던 코트의 존재가 너무 놀라웠다. 나에게 이런 코트가 있었나? 아 맞다. 나 저 아이보리 코트가 있었지. 아니 있었나? 순간 너무 당황했다. 그동안 이런 찰나의 순간들을 기억 못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 쇼핑 패턴은 직접 산 옷을 기억하지 못하기가 더 어려운 편에 속한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더 깜짝 놀랐다. 집에 가자마자 열어 본 옷장에는 그때 그 아이보리 코트가 걸려 있었다. 언니에게 물어보니 심지어 내가 그날 언니를 만나서 산 옷이란다. 단정한 코트가 필요한 일이 있어 다급히 샀다면서.


'아 내 옷이 맞구나'


덕분에 오랜만에 '기억'이라는 단어 그 자체를 꺼내보았다. 기억. 어쩌면 정말 대표적으로 이기적이기 쉬운 개념 중에 하나가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경험한 틀 대로 보고 내가 믿고 싶은 대로 기억하고. 뚝 떼어 펼쳐보면 막상 같은 순간도 나의 기억과 상대의 기억은 다른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여행의 묘미는 같은 공간을 경험하고 돌아와도 수백수천의 다른 감성이 드러나는 그 순간이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기억의 성질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경험의 크기대로 기억하는 것.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것. 내가 볼 수 있는 대로 기억하는 것.

그래서 가끔은 이 기억을 나의 주관에서 떼어내어 그 순간에 함께 했던 사람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생각해봐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결론이 섰다.


 보니와의 일화를 통해서도 '기억'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지난 날 보니가 북유럽 한 달 살기를 해보던 그 어느 날에 카톡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밤이 있다. 친구와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밤 중 하나였던 날인데 나도 순간순간 놀랄 만큼 꽤 자주 보니의 입에서 '왜 언니 그때 있잖아 나 한 달 살기 하러 갔던 그 밤에 새벽에 색 이야기하고, 나는 어떤 색에 어울리는지 내 키워드가 뭔지 대화했던 그 날' 이 자주 등장한다. 그 횟수에 비례해 아 이 날이 그녀에게 꽤 진한 하루였음을 느낀다.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기억이란 게 이런 거라고. 기억하는 자의 인생에서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고. 마침 어제도 그녀의 입에서는 '북유럽'이라는 키워드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누군가의 기억에 남는다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기억을 하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어야 하니까. 내가 아니라 아니라 상대방의 기억 가치 기준에, 그 의미에 들어가야 하니까. 그리고 또 잊을만하면 떠올릴 수 있을 만큼 강하기도 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하루의 데이터를 쌓아가는 사람들이니까. 망각의 동물인 인간에게 기억이란 그래서 더 소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기억이 이기적이라면 그 틈은 굉장히 단단할 테다. 그 틈새를 꾸물꾸물 비집고 나의 자리를 만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된다는 건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하겠지.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주고 함께해주거나, 누구보다 그 사람을 이해해주거나, 진심을 갖거나. 필요할 때 적절한 도움의 손길을 건네거나 하는 것들. 그게 기억이란 자리 한 켠을 차지할 수 있는 방법들이겠거니.

잊을만하면 내게 순간의 차분함을 선물해주면서 나 여기 있다고 존재감을 드러내는 넬의 이 노래처럼.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네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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