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훈 Apr 20. 2020

나의 스펙트럼

자존감에 대하여

 내가 좋아하는 대만 영화 <하나 그리고 둘>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요즘 들어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게 별로 많지 않더라고요. 거의 모든 일에 불확실한 마음으로 눈을 떠요. 왜 매일 아침 일어나서 그런 불확실한 일을 반복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내 마음에 콕 스며든 대사다. 그 어떤 것도 확실하게 말하기가 어려운 요즘이다. 글을 쓰면서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를 날이 많고, 문장을 쓸 때는 확실하게 ‘입니다.’로 끝나는 문장보다 ‘인 것 같습니다.’로 마치는 문장이 마음에 편하다. 때로는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를 항상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과 달리 나는 내가 나라는 사실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소하고도 경이로운 순간들을 만끽한다. 좋아하는 음악이나 소설, 영화들이 뭔지도 잘 알고 왜 좋아하는지도 설명할 수 있다. 세상이 정해놓은 방향대로만 가지 않는 나만의 신념도 자연스럽게 삶의 흔적과 함께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다만 신기한 건 ‘이제는 나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아.’라는 지점에 다다르면 내가 정의한 나를 속수무책으로 망가뜨리는 어떤 순간들이 삶에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데미안이라는 책은 읽을 때마다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고. 새가 알이라는 세상을 깨고 날아가는 과정은 살면서 한번이면 족할 것 같았으나 실은 끝없이 반복된다. 알은 깨도 깨고 계속 있다. 내가 나로 살 수 있기 위한 몸부림은 어쩌면 평생의 과제일지도 모른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요즘도 그 지점에 다다른 것 같다. ‘이제는 이렇게 살면 될 것 같아.’하고 나만의 기준이 견고해질 때 쯤, 이 세상 속에서 먼지보다도 사소한 일들이 내 안에선 거칠게 소용돌이를 일으킨 것이다. 최근 나는 사랑하는 친구 A를 잃었다. 그 친구는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을 찾으려는 집요함이 있는 친구였다. 난 A의 그런 면을 좋아했다. 그리고 함께하는 시간동안 그 친구를 많이 닮아갔다. 나는 A와 함께하면서 점점 문제를 회피하는 것을 싫어했고 집요함이 있다면 이 세상에 해결 못할 문제는 없다고 믿었다. 우리 둘은 잘 맞았다. 다툼이 있으면 서로의 불만을 말해 합의점을 찾아갔고, 하나부터 열까지 끝없는 대화를 통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겼다. 우리의 대화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많은 것을 표현하고 공유하며 어느덧 서로의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한 때 진실로 서로의 평생을 바라봐 줄 수 있는 친구가 될 꺼라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확신에 돌을 던지는 일이 내게 일어났다. 내게 사랑하는 친구 B가 한 명 더 생긴 것이었다. B는 A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 친구는 말이 많이 없었다. 구구절절하게 모든 걸 말하지 않고 정말 필요한 말만 하는 친구였다. B와 있으면 많은 대화가 펼쳐지지 않았다. 내가 ‘나는 이런 사람이야.’하고 말하면 B는 ‘응.’ 이게 다였다. 내가 ‘너는 어떤데?’라고 되물으면 B는 ‘난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처음에는 이런 B의 모습에 화가 났다. 넌 왜 나를 더 궁금해 하지 않는 거야? 넌 내게 왜 말해주지 않는 거야? 넌 왜 맞춰가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거야? 넌 왜 우리 사이의 차이를 좁혀가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는 거야? 내게는 물음의 연속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물음들은 너무나도 나의 입장에서만 B를 몰아붙이는 말이었다. 그 친구에게 있어 ‘응.’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었고, 침묵은 서로를 알아가는 대화의 또 다른 방식이었으며, 서로간의 차이는 차이대로 내버려두는 초연한 태도일 뿐이었다. B는 고맙게도 내가 물음을 던질 때마다 화를 내지 않고 자신을 잘 알려주었고, 시간이 흘러서 나는 B를 B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어느덧 A의 A스러움을 사랑하고, B의 B스러움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둘은 각자대로 아름다웠다.

기묘한 일은 그 때부터 일어났다. 나는 A와 있다가 A와 나의 차이로 인해 문제가 생기면 B의 입장이 이해가 갔고, B와 있다가 B에게 서운한 점이 생기면 A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A와 있을 때 나는 B처럼 행동했고, B와 있을 때 나는 A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혼란스러웠다. A라는 친구는 내가 B라는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이해하질 못했고, B라는 친구는 내가 A라는 친구처럼 행동할 때 몹시 힘들어했다. 둘은 너무 달랐기에 A와 B라는 친구를 함께 보는 것은 정말이지 이질적인 그림 두 편을 한 벽면에 같이 걸어두는 것과 같은 느낌일 것 같았다. 한 그림은 타오르는 태양이 강렬한 붓 터치로 비비드하게 그려진 유화, 한 그림은 잔잔한 풀들이 물을 머금고 연하게 그려진 수채화로. 난 유화도 좋고 수채화도 좋은데 둘은 섞일 수가 없었다. 그때쯤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유화야 수채화야?

     

한 때 나는 내가 유화에 가까운 사람이라 생각했다. 삶을 멋지게 살아가는 사람은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가득한 사람, 잘못된 무언가에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러지 못한 사람은 멋지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B를 만난 뒤로 나는 무언가로부터의 회피가 직면의 또 다른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에게는 회피가 타인의 대한 배려이자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잘못된 무언가에 분노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세상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배우게 되었다. 어설픈 대화와 공감은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 까지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될 때쯤 B를 만난 것인지, B를 만나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여기서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은 A라는 친구가 이렇게 변한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아니 내가 설득을 못시킨 걸 수도 있겠다. A는 어느 날 ‘너는 항상 나랑 비슷했는데 이젠 변했어.’라고 말했다. 변한 건 맞는 말이었다. 부정하지 않았다. A는 덧붙였다. ‘넌 지금 잘못했어.’ 그 말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A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냥 나의 생각대로 행동할 뿐인데, 우리가 다른 지점이 있어서 그랬을 뿐인데 그게 나의 잘못이라고 여겨지는 게 싫었다. 미안하다고 할 순 있어도 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A는 그런 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 역시 그런 A를 받아들일 그릇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A와 나 사이에는 금이 갔다. 한 번 금이 간 사이는 깨지기 쉬웠다. 미세한 금은 조금씩 관계에 균열을 내더니 어느 순간 쩌억 갈라져 둘을 완전히 갈라놓고야 말았다. 그럼 나는 더 이상 유화가 아니고 수채화에 가까운 사람일까? 나는 A를 A라는 이유로 미워하지 않는다. 아니 가끔은 집요하게 미워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A가 변하길 바라지는 않는다. 이제는 멀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A가 A답게 살아가길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유화도 수채화도 좋아한다.



그런 고민이 이어지던 어떤 날에는 내가 쓴 소설을 합평 받는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영훈님의 소설은 좀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야 할 문제들이 있어요. 소설 속 주인공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은 사실은 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강박으로 보이기도 하거든요.”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영훈님의 소설은 큰 굴곡들을 차분하게 다뤄서 좋아요. 평화를 깨뜨리지 않고 나쁜 사람이 없는 소설 그대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은 나와 내 소설을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나름의 평을 내렸다. 그 속에서 나는 좀 더 유화가 되어보라고 추천받기도 했고, 수채화로 있어달라는 목소리를 듣기도 했다. 내게는 둘 다 맞는 말이었고 필요한 말들이었다. 두 가지 결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두 가지의 가능성이 모두 존재하는 것이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내가 어떤 그림이 될지는 결국 내가 정할 문제였고, 그러기 위해선 다시 한 번 나만의 기준이 필요했다. 그 기준을 정하기 위해선 내가 쓴 소설만큼이나 나 스스로를 헤집는 집요한 관찰이 있어야만 했다. 


그 날 이후 나는 내가 어떤 그림인지에 대해 수없이 질문하며 고민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기도 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접해보기도 하면서 나에게 맞는 것을 스스로에게 되물으며 하나 둘씩 알아가는 중이다. 그 과정 속에서 어느덧 욕심이 생겼다. 유화도 수채화도 겸비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순 없을까 하는. 어쩌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물과 기름은 섞일 수 없지만 물과 기름이 함께 공존하는 그림을 그릴 순 있진 않을까 하고.      

이런 시간을 거치다 보면 내가 어떤 그림인지 정의내릴 수 있는 날이 올까? 아니면 유화도 수채화도 아닌 또 다른 그림을 만나 그 그림이 되어버릴까? 그 그림이 또 다른 그림을 만나고 만나 생을 다했을 때 나는 무슨 그림으로 남아 있을까? 나는 살아갈수록 무언가를 확실하게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기대와는 달리 세상은 살아갈수록 정확한 그림이나 정답은 없다는 사실만을 알려주는 것 같다.



세상이 정말 그렇다. 세상은 온통 회색지대인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흑과 백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심판에 놓일 때가 많다. 나와 타인. 이성과 감성. 직면과 회피. 여성과 남성. 자연과 도시. 부와 가난. 행복과 불행 등등. 무지개가 일곱 빛깔인 줄 알았던 어린 꼬마들은 살면서 사실은 무지개가 규정할 수 없는 수많은 다른 색들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된다. 나는 우리가 흑과 백 중 하나를 쉽게 선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효율적이고, 무언가에 소속될 수 있는 편안함을 준다. 하지만 흑이 되는 순간 나는 백이라는 가능성을 놓치고, 백이 되는 순간 흑이라는 가능성을 놓치게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의 스펙트럼, 그것이 가능성이라면 그 가능성을 최대한 열어두고 모든 색을 만나본 뒤에야 내가 누구이고 세상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가 된다면 우리는 모든 색을 품은 ‘흑’인 동시에, 모든 빛을 품은 ‘백’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정의내릴 수 없는 불확실함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의 나는 차를 마시며 차분한 클래식을 듣지만 내일은 베이스가 진하게 울리는 락을 들으며 리듬을 탈 수도 있는 것이다. 삶의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그저 오늘의 나, 오늘의 세상에만 집중하며 살고 싶다. 정의내리지 않아 아무 것도 되지 않음으로써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 지금의 나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저 바라봐 주는 것. 세상을 판단하지 않고 그저 관찰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자존감이고 나와 내가 속한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너는 어떤 사람이야? 그렇다면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말했던 명대사 ‘나의 기분은 스스로가 정해. 오늘 나는 행복으로 할 거야.’를 빌려 말하고 싶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정해. 오늘의 나는 스펙트럼으로 할 거야.’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애어른이라 불리던 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