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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잠 Jul 28. 2016

왜 나를 피하나요?

나는 당신을 모르니까요

여자라면 누구나 겪어봤을 일 들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한다. 너무나 당연하게 겪어 온 일들이기 때문에 여자들에게는 전혀 새롭지 않은 일들이지만 남자들은 잘 모른다.

며칠 전에 내 동료가 말했다. 최근 자신이 여자라서 겪어야 했던 불편한 일에 대해 남자 친구에게 얘기를 했단다. 그런데 평소 여성 인권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던 남자 친구가 그런 일의 존재 자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어이도 없고 화도 나서 싸웠다고 했다. 말싸움으로는 도저히 당할 수 없었던 남자 친구를 이번에는 이겼다고 하면서 웃었다. (남자 친구가 미처 몰랐던 일이었기 때문에 당황했거나, 할 말이 없었던 듯)

남자를 탓하고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남자들은 모를 수밖에 없다.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다만,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이런 일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런 일들을 겪고 있는 여자들의 심정을 헤아려 준다면 여자들의 살이가 조금은 더 안전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한동안 만원 버스를 타야 하는 일이 많았다. 대도시에 사는 여자라면 누구나 버스에서 추행범을 만나 본 적이 있다. 나도 그렇다. 고등학교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처음이라 이야기한 이유는 그 이후로도 꽤 여러 번 만났기 때문이다.

내 뒤에 서서 몸을 바짝 밀착하는 남자. 조금 지나면 손이 앞으로 온다. 그리고 내 몸을 더듬는다. 대부분의 경우에 도망갈 수는 없다. 만원 버스 안이라 몸을 움직이기도 힘겹기 때문에. 소리를 지를 수도 없다. 소리를 지르면 내가 뭐 어쨌는데 이 여자가 이러냐고 되려 화를 내는 사람을 많이 목격했다. 아니 사실, 그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처음 그런 일을 당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그냥 '공포'였다. 너무 무서웠다. 몸은 얼음처럼 굳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생각할 수가 없다.

한 두 번쯤 그런 일을 당하고 나서 꽤 큰 백팩을 샀다. 버스에 탈 때는 엉덩이까지 늘어뜨려 가방을 메었다. 밀착을 막기 위한 방책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안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남자가 뒤에 오면 어떻게든 자리를 이동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대학교 때 일 년에 한 번씩 있는 학회 모임에 갔다. 졸업한 선배들까지 찾아오는 행사라서 모두들 밤새 진탕 술을 마셨다. 자정이 넘은 시간, 술이 취한 나는 같은 학번 남자 친구와 바람을 쐬러 나갔다. 친구가 잠깐 휴지를 사러 간 사이 나는 엉망으로 취한 채 도로가에 앉아 있었다. 나는 술이 약한 편이라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나는 필름이 끊기지 않는다. 몸이 먼저 가버리기 때문이다.) 한 대의 차가 내 앞에 섰다. 그리고 한 남자가 내리고 이어 다른 한 남자가 더 내렸다. 나에게 와서 친구가 나를 찾으니 자기 차를 타고 가자고 했다. 당연히, 나는 싫다고 했다. 그냥 여기 앉아 기다릴 거라고 했다. 내가 버티고 앉아 있으니 남자는 갑자기 욕을 하면서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억지로 일으키려고 했다.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한 가장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친구가 간 가게 쪽을 쳐다봤다. 마침 친구가 달려오고 있었다. 꽤나 큰 덩치를 가진 친구였다. 남자들은 마구 욕을 하면서 나를 팽개치더니 서둘러 차를 타고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 난 울지도 않았다. 실감이 안 났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당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술을 먹는 일이 거의 없다. 업어서라도 나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줄 사람(남편이나 가족 같은 절친)이 없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취하지 않는다.


아침 7시 반쯤, 출근하는 길이었다. 아무도 없는 골목을 혼자 걸어가고 있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쫓아 두리번 거렸는데 놀이터 입구에서 한 남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지를 내리고 손을 바쁘게 움직이면서.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데서 만족을 느낀다. 그래서 별거 아니라는 듯 무시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된다. 나는 이런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사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날려 줄 멘트도 준비하고 있었다. (볼 것도 없다거나, 꺼지라거나 여하튼 한 껏 비웃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상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내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저 사람이 쫓아오면 어쩌지?' 정말 등골이 오싹했다. 몸이 저릿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 사람의 시선 속에서 달릴 수도 달리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 사람이 쫓아오기 전에 빨리 그 골목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달려서 도망치면 그 사람을 자극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천천히 걸을 수 있을 리도 만무했다. 그 사람은 나보다 빠를 것이고 나보다 힘이 셀 것이 너무 명백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골목을 빠져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얼마나 어정쩡한 걸음으로 골목을 걸었을지 웃음까지 난다.

어쨌건, 나는 다시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출근을 위해 먼 길을 돌아가게 되었지만 그 골목을 혼자 다시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습관이 생겼다.

골목길의 끝에서 한 번 살펴본다. 혼자 남자를 만나게 될 것 같으면 그 길을 아예 가지 않는다. 특히 술이 취한 사람이라면 더.(술이 취한 아저씨가 바지를 내리고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나를 쳐다본 적이 있다!)


내가 겪은 일들이 특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지키기 위한 습관을 가지게 한다.

버스에서 남자가 뒤에 서면 다른 자리로 이동하는 나의 행동에 대해 기분이 나빠진 어떤 사람이 물을 수도 있다. 왜 나를 피하냐고. 나는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추행범인지 아닌지 모르기 때문에 조심할 수밖에 없다고. 추행범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 나를 만지는지 만지지 않는지 기다려 볼 수 없는 노릇이라고. 골목에서 남자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남자가 바지를 내리는지 안 내리는지 기다려 볼 수는 없다. 멀더라도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게 상책이다.


남자가 어떤 여자를 쫓아간다. 남자는 여자에게 호감을 느꼈고, 그녀와 어떻게든 인연을 만들어 보고 싶다. 여자는 남자가 어떤 마음과 이유로 자신을 쫓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당연하게도 두려움이다. 남자들은 억울할 것이다. 하지만 명백하게, 여자들은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다.


내가 가진 생각이 모든 남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는 행위인 건가. 아니다.

여자들은, 나는, 그냥 조심하고 있을 뿐이다.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여성 혐오 - 여성에 대한 혐오나 멸시, 또는 반여성적인 편견을 뜻한다. 이는 성차별, 여성에 대한 부정과 비하, 여성에 대한 폭력, 남성우월주의 사상,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포함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며 고대 세계에 관한 신화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 신화(설화) 속에서도 발견된다. (위키백과)


'여성 혐오'라는 말에 사람들이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 이 용어가 상당히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을 잘 알지 못한다.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편견의 대상이 된 적이 있고, 차별을 당한 적이 있으며 폭력에 노출되었고 성적 대상으로 취급당한 적(심지어 어린 남자아이에게까지)이 있다. 그러니 우리 사회는 여성을 혐오하는 사회가 맞다. 나는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불평등을 감수하기도 하고, 어떤 일을 포기해 버린 적도 있으며 남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도 있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인정해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남자아이가 나에게 말했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앞에 가던 여자가 치마를 모아 쥐더라고. 자기가 보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못생겨서 볼 생각도 없었는데 그렇게 행동해서 기분이 나빴다고. 그래서 얘기했다. 그 여자는 네가 속옷을 볼지 안 볼지 알 수 없으니 조심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너를 치한으로 생각해서가 아니라고.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못생겨서 볼 생각도 없었다는 말이 나를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내가 소모해야 할 에너지가 너무 클 것 같아서 피하고 말았다. 그 아이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모르더라도 앞으로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여자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기를, 적어도 비난하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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