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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잠 Aug 06. 2016

뿌리는 반드시, 싹을 틔운다
<침묵의 뿌리>

조세희 / 열화당

"알리바이라면 우리 시대의 시민 모두가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 땅 어느 곳의 역사가 20년밖에 안 된다는 것은 곧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p136 


1. 침묵     

침묵하고 있는가, 나는

그렇다.

왜 침묵하고 있는가

두렵다.

무엇이 두려운가     

세상의 언어처럼 왜곡되는 것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찾을 수 없어 헤매는 것

결국 찾지 못하는 것

아무것도 결론지을 수 없는 것

나의, 너무나 허술한 알리바이로 더 이상 무죄를 주장할 수 없는 것     


요즘은 사람들을 만나면 삭막하기 그지없다. 사람들은 모두 지쳐있다. 사람들은 모두 위로받기 원한다. 위로를 받기 위해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도 위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모두들 위로받지 못하고 더 지쳐버린다. 그래서 날카로워진다. 누가 더 힘든지 내기라도 하듯 앞 다투어 자신의 괴로운 상황을 토해낸다. 그러나 결국, 또, 위로받지 못하고 토악질로 따가워진 목을 감싸며 쓸쓸하게 헤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못한다. 내 고통만으로도 넘쳐나는 몸뚱어리에 남의 말을 채울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점점 더 동문서답이다. 막혀간다.  왜 요즘은 그렇게 다들 힘든 걸까? 사실 옛날에도 그렇게 편안한 삶을 누린 것은 아니지 않은가?     

대학교 시절. 사실, 대학에 들어갈 때부터 나에게 그것은 일종의 사치고 도전이었다. 대학에 합격했지만 입학금은 전혀 대책이 없었다. 다행히도 국립대학이었고, 약간의 장학금을 받았고, 마침 이러저러한 돈이 생기는 바람에 나는 대학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대학생활의 자유와 낭만을 막 알게 될 쯤부터 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8,9시간 서빙을 했고, 환기가 되지 않는 깡통 같은 매점에서 바가지 땀을 쏟으며 일했고, 눈알이 터지도록 논술 첨삭을 했고, 무섭게 나를 공격해오는 아이들을 상대로 학원 강사를 했고, 학교를 다니는 내내 그놈의 돈과 싸움을 해야 했다. 그래도 나는 그때의 삶을 ‘전쟁 같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임을 기다리며 충분한 시간 동안 ‘나’를 생각할 수 있었다.      

요즘 나는 나의 삶을 ‘전쟁 같다’고 생각한다. 요즘 나는 직장에 있는 동안 ‘나’로 살 수가 없다. 아예 ‘나’를 잊어버리곤 한다. 대체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일까. 대학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다른 걸까. 그때도 경제적 압박은 늘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바쁘게 살았다. 그래도 지금처럼 황폐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2. 뿌리.     

생각해 보면 그즈음의 나는 침묵하고 있지 않았다. 어쭙잖은 시를 썼고, 다른 이들과 시를 돌려보며 토론하고 울고 술을 마셨다. 친구들과 어울려 잡지도 만들었다. 눅눅한 동아리방에서 어렵게 구한, 자막도 달리지 않은 영화를 보며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생활이 내 삶의 전체였다. 그래서 의심하지 않았다. TV를 통해 보는 세상에서 내가 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4학년이 되었을 때 잡지를 만들던 멤버들이 손을 놓기 시작했다. 취업을 하고 대학원을 갔다. 시를 쓰는 모임에서도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믿고 있던 전체의 세상은 너무나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몇 년의 방황을 했고, 나도 그들처럼 직업이라는 것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젊은이가 하루에 열두 시간씩 일했다. 어떤 때는 스물세 시간 일한 다음 한 시간 잤고, 어떤 가혹한 환경에서는 눈 한 번 붙이지 못한 채 마흔여덟 시간을 내리 일에만 매달려야 한 적도 있다. 성공은 도덕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 속에서 그는 일해 왔다. 회사는 생활비와 일반 시민보다 조금 더 저축할 급료를 주는 대신 성장기의 그가 마음속으로 귀중하다고 믿으며 키워 온 것을 빨리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상한 정신을 요구했다. - 단편 ‘풀밭에서’ 중     


직장을 다니는 몇 년 동안 나는 내가 왜 그렇게 힘든지 알지 못했다.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엄청난 경쟁 속에서 단단히 자기 자신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경쟁구도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고, 당연히 경쟁에서 이기지 못했다. 언제나 패배자였고 언제나 여러 걸음 뒤쳐졌다. 사람들에게 버려진 일들이 나를 찾아왔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자리에서 일하기 일쑤였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너무나 억울하고 분했다. 그래서 나도 내 몫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니 사람들을 경계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편안해지지 않았다. 내 몫을 잘 챙기지도 못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리고 있는 불쌍한 인간이 있을 뿐이었다. 그 인간은 단 한순간도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진 세상의 충실한 부속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간. 나를 집어삼키는 무서운 침묵.           


3. 침묵의 뿌리     

어린 시절 내가 가졌던 세상. 인간다움에 대하여 고민하고 인간다움을 꿈꿀 수 있는 곳. 그러나 내가 살았던 그 시절은 사실, 실재하는 세상이 아니었다. 세상을 조금 빗겨서 있는 대학에 안전하게 숨어서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세상을 살았던 것이다.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세상.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 법전 안에서만 살아있는 세상.      


내가 ‘참 근사하다!’ 감탄하며 읽는 부분은 법전 앞 쪽에 있다. 그것은 정말 근사해 그 부분의 말들을 읽을 때 나는 아름다운 음악을 함께 떠올리고, 몇 해 전부터 보기 힘들어진 민들레 꽃씨의 예쁜 비행 모습을 갑자기 대하게 되는 착각에 빠진다. 이른바 자유권적 기본권과 사회적 기본권의 보장을 국민에게 약속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인데,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지닌다.”는 문장은 큰 감동을 주는 부분 가운데서도 압권이 아닐 수 없다. 국가는 사회 보장의 증진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 그리고 생활 능력이 없는 국민은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확약까지 우리는 한 호흡으로 읽을 수 있다. - p92-93


‘침묵의 뿌리’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결국 ‘분배’의 문제다. 이 세상의 자원은 이 세상의 구성원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너무 많은 사람이 소외되고 너무 적은 사람이 많은 것을 소유한다.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다. 전 세계적인 문제이고 바로 너와 나의 문제이다. 또한 이것은 너무나 오래전부터 계속되어 온 문제이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계속될 문제이다. 왜 그럴까.     

‘침묵은 뿌리’는 1984년의 글이다. 그러나 이 글이 보여주고 있는 세상은 지금과 너무 똑같아서 놀라울 따름이다. 30년의 세월이 흘렀고 우리가 사는 집이, 사용하는 물건들이 엄청나게 바뀌었는데도, 우리의 삶은 여전히 그때의 모습과 같다. 가난은 여전히, 끈질기게도 세습되고(물론 부유함도 끈질기게 세습된다),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는 자는 탄압을 받는다.

생각해 보면 한동안 세상이 조금씩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믿음이 생겼던 때도 있었다. 느리지만 조금씩. 그렇게 조금씩 변화한 세상을 한 번에 되돌려 놓은 새로운 정부. 정부의 목표는 ‘경쟁’이다. 경쟁을 통한 효율성의 획득. 효율성을 통한 빠른 발전. 그런데 엄청난 경쟁을 통해 얻어진 발전의 대가는 대부분 소수의 사람들이 가져간다. 그래서 정부의 목표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다수의 헌신’인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단순화시키고 보면 말도 안 되는 이러한 구도는 사실, 복잡한 층위와 여러 가지 매혹적인 가면으로 실체를 가리고 있다. 그래서 ‘헌신’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일은 어렵기만 하다. 그래서 다시 가난은 끈질기게 세습되고 저항하는 자는 탄압을 받는다.      


나는 늘 궁금하다. 왜 사람들은 다 같이 천천히 가려고 하지 않을까. 누군가 뛰기 시작하면 나머지도 따라 뛰지 않을 수 없고 누군가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누군가는 더 빠른 오토바이를 찾는다. 아무도 뛰지 않으면 된다. 서로를 보며 다 함께 천천히 걸으면 된다.     

‘경쟁’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과연 그 속에 속하는 사람일까?

나는 이 전쟁 같은 세상의 모습에 대하여 무죄일까?     


침묵의 뿌리...  그것은 부끄러운 침묵의 끈질긴 성질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침묵하고 있는 자에게도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다는 뜻으로 읽는다. 

침묵하지 않았던 시절 내가 가졌던 세상이 침묵하는 지금 내 속 깊은 곳에 뿌리로 박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뿌리가 힘을 내서 싹을 틔우고 자라면, 혹은 나의 언어가 깊어져서 그 뿌리를 다시 만나면, 이 침묵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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