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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잠 Aug 15. 2016

멈출 수 없는 동문서답
<호문쿨루스>

야마모토 히데오

내가 보는 빨강은 네가 보는 빨강과 같을까?

내가 보는 나와 네가 보는 나는 같을까?

내가 보는 너와 네가 보는 너는?

결국은 답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너의 눈으로 볼 수 없고 너는 나의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일하던 고층건물과 노숙자들이 생활하는 공원 사이, 낡고 작은 차 안에서 살고 있는 나코시.

어느 날 괴짜 의학도 마나부가 나타나 그에게 트리퍼네이션(두개골 구멍 뚫기, 관추술, 개공술 등으로 불리는 수술, 기본적인 개념은 두개골에 구멍을 뚫어서 혈류량에 변화를 주는 것)을 제안한다.

트리퍼네이션 이후 그의 눈 앞에 나타난 이상한 형상들.

당황하는 나코시에게 마나부는 설명한다. 그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호문쿨루스이며 이것은 '인간의 오감으로 경험하여 뇌에 저축된 기억의 지도가 입체화된 것'이라고.


호문쿨루스 - 라틴어로 '작은 사람'을 뜻한다. 1940~50년대 뛰어난 신경외과 의사였던 와일드 펜필드가 살아있는 사람의 뇌를 연구하여 인간의 대뇌와 신체 각 부위 간의 연관성을 밝힌 지도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각 신체부위를 담당(지배)하는 뇌 부위의 크기에 따라 인간의 모형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펜필드의 호문쿨루스라고 한다.


펜필드의 호문쿨루스


이 모형은 실제 인간의 모습과 크게 다른데, 뇌가 입이나 손을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는지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코시가 보게 된 호문쿨루스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마나부의 표현을 다시 빌자면, '마음속의 심층부로 가라앉은 뒤틀림이 괴물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나코시가 만난 호문쿨루스다. 이것은 기억과 트라우마, 감정과 의지, 벗어나고 싶거나 도달하고 싶은 욕망 등 한 인간을 규정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형상화 - 형체가 분명하지 않은 추상적인 본질 따위를 어떠한 방법이나 매체를 통해 구체적이고 뚜렷한 형상으로 나타내는 것.


한 인간의 과거와 현재가, 혹은 미래까지 그 시간을 살아온 마음과 뒤엉켜  총제적으로 '형상화' 된 것이 나코시 눈 앞에 보이는 호문쿨루스다. 그의 눈 앞에 나타난 호문쿨루스들을 보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만화라는 장르만이 해낼 수 있는 정말, 섬뜩한 '형상화'였기 때문이다. 작가는 상상의 힘으로 인간의 본질에 다가가고 있었다!


트리퍼네이션 이후 나코시 앞에 나타난 풍경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자신의 호문쿨루스를 보지 못한다. 자신이 어떤 뒤틀림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그들은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만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나코시가 호문쿨루스를 보게 된 까닭으로, 그들의 뒤틀림과 왜곡은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나코시의 눈 앞에 호문쿨루스로 나타난 그들은, 나코시와 만남을 갖게 된 까닭으로 자신의 호문쿨루스를 직면할 수밖에 없다. 직면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괴물로 형상화된 자신을 바라봐야만 하는 일은 얼마나 끔찍한가. 그러나 그러한 고통을 이겨내지 않고는 뒤틀림과 왜곡을 바로잡을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고통스러운 직면의 과정을 지나, 그들은 호문쿨루스를 벗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들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난 후, 나코시는 자신의 몸이 되어버린 그들의 호문쿨루스를 발견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호문쿨루스를 자신의 팔로 갖게  된 나코시


어째서 그들의 호문쿨루스는 나코시에게 옮겨왔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만 볼 수 있다. 강아지가 있는 골목을 지나는 사람이 있다. 그가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강아지를 발견하고 다가갈 것이다. 만약 그가 강아지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의 눈에는 강아지가 전혀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나코시에게는 호문쿨루스가 보인다. 그러나 모두의 호문쿨루스가 보이는 것은 아니다. 나코시도 자기가 보고 싶은 것, 혹은 볼 수 있는 것만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나코시와 만나 호문쿨루스를 옮겨 준 사람들의 사연이 나코시의 삶 어느 부분과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자신과 유사한 경험이나 상처를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그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나코시는 자신과 같은 뒤틀림을 가진 호문쿨루스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호문쿨루스를 직면하고 그 상처로부터 벗어날 때, 자신은 벗어나지 못하고 남겨진다. 나코시는 그것이 자신의 호문쿨루스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코시가 만난 세상과 호문쿨루스들은 자신의 모습이 투사된 것이다. 나코시가 안고 있던 상처가 다른 사람의 호문쿨루스라는 가면을 쓴 채 자신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나코시는 여러 호문쿨루스를 만나는 동안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간다. 자신이 보는 호문쿨루스가 결국은 자신의 뒤틀림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코시는 잘 나가는 은행 직원이었다. 돈과 명예, 사람들(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 포함)을 모두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자신의 삶을 '실감'할 수 없었다.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이 자신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냄새를 맡고 맛보고 감각함으로써 실감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직장을 떠났고 작은 차 안에서 노숙을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차 안에서 태아처럼 웅크리고 잔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가 자신을 못생긴 아이로 규정한 순간부터 못생긴 아이가 되었다. 그는 자신감을 잃었고 사람들을 피하며 땅만 보고 살았다. 성형을 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갖게 되었을 때 그는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을 수 있었지만 주목받고 있는 자신을 실감할 수가 없었다. 그가 차 안에서 태아처럼 웅크리고 잠이 드는 것은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다. 물론 본래의 자신은 성형한 얼굴을 본래의 것으로 돌리는 것과 같은 단순한 행위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돌아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나코시는 호문쿨루스들을 만나면서 그것이 자신과 연관되어있음을 깨달아 갔다. 그래서 그는 호문쿨루스 속에서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본래의 자신을 찾으려 한다. 자신에게 보이는 호문쿨루스들이 자신을 투사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들을 탐구함으로써 본래의 자신에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찾고 싶다. 아니 본래의 모습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생각해보면 그가 그러한 장소에서 노숙을 하게 된 것도 자신을 찾고 싶어서였다. 트리퍼네이션은 그의 그런 간절함을 호문쿨루스를 보는 능력으로 만들어주었다. 사실, 이 모든 사건 속에 우연은 없다.


그러나 마침, 그에게서 호문쿨루스를 보는 능력이 사라진다. 직면의 고통이 사라지는 대신 자신의 존재가 미궁으로 사라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나코시는 마나부에게 다시 트리퍼네이션을 해 달라고 하지만 거절당하자 스스로 트리퍼네이션을 감행한다.


이 그림은 나코시가 아니다. 마나부가 가지고 있는 트리퍼네이션 관련 자료들 속에 있는 사진인데 한 사람이 스스로 트리퍼네이션을 시술하고 기뻐하는 모습이다.  이 사진은 몇 장면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그 사진 속 표정이 너무나 강렬해서 독자인 나의 머릿속에도 각인이 될 정도였다. 뼈를 뚫는 고통 따위는 전혀 인식할 수 없을 만큼 기쁨이 가득한 얼굴. 자신을 만날 수 있다는 확신. 자신을 만나는 순간이 이렇게도 간절한 것으로 표현되었다. 나코시는 이 사진을 보면서 트리퍼네이션에 대한 결심을 굳힌다.


그리고 나코시는 나나코를 만난다. 나나코는 나코시가 성형을 하기 이전에 만났던 여성으로 몹시 추녀였지만 나코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해 주었었다. 나코시는 나나코가 호문쿨루스를 보는 능력(물론 나나코가 보는 호문쿨루스는 나코시의 것과는 차이가 많다. 호문쿨루스는 자신을 투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가 본 것은 호문쿨루스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이미지와 분위기 등을 형상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지도.)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성형을 했고, 수시로 얼굴을 바꾸어 버리는 호문쿨루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변했으며, 자신은 나나코가 아니라고 한다. 나코시는 나나코에게 트리퍼네이션을 한다. 그리고 나나코에게 말한다. '나를 봐줘'라고. 나코시는 그녀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 주길 바랬다.


그러나 나나코에게 트리퍼네이션을 한 이후 그들은 서로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가진 호문쿨루스를 본다. 나코시에게 나나코는 나코시의 모습이다. 나나코에게 나코시는 나나코로 보인다. 나코시는 그녀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에게는 그녀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코시에게도 그녀는 사라지고 자신만 남는다.



거리로 나온 나코시의 눈 앞에 이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얼굴을 한 호문쿨루스가 되어 나타난다. 그들이 모두 호문쿨루스가 된 것(그 이전에는 분명 호문쿨루스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은 나코시가 갑자기 그들 모두와 접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완전히 접점을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된다. 접점이 있다는 것은 똑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경험과 가치를 가지고 있으나 공감할 수 있는 부분, 그것이 접점이고 그것이 독특한 형태의 호문쿨루스로 나타났던 것이라면, 나코시의 눈에 보이는 수많은 나코시는 그냥 나코시일뿐이다. 더 이상 '투사'가 아니라 '자기화'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나코시에게 타인은 없고 자기만 남는다. 자기만 가득한 세상은 천국일까 지옥일까.


여기는 천국인가, 지옥인가 라고 나코시는 읊조린다


나코시는 호문쿨루스를 통해 자신을 찾고 싶었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찾기 위해 헤매는 속에서 자신에게 너무 집중한 나머지 타인과 닿아있던 손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의 세상에는 온통 자기 자신만 가득하다. 그의 눈에 보이는 모든 호문쿨루스가 자신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의 열망은 이루어진 것일까? 타인이 모두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 선 자신은 진정한 자신일까? 아무래도 그는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나를 알기 위해 나만을 바라본다면 나를 알 수 없다.

본래의 나는 대체 무엇일까. 타인에 의해 규정된 나는 내가 아니다. 그러나 타인이 존재하지 않으면 타인과 구분되는 경계로서 규정되는 나도 없다. 무엇으로도 규정되기 이전의 나를 찾아야 하는 걸까. 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나를 찾기 위해 타인과 손을 잡을 수도, 잡지 않을 수도 없는 나. 그 끝없는 균형 맞추기 속에 위태롭게 존재하는 것이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코시는 빌딩과 공원의 중간에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말하는 행복과 네가 말하는 행복이 같지 않다. 내가 보는 세상과 네가 보는 세상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 판단할 수도 없다. 나는 너의 눈으로, 너는 나의 눈으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소통할 수 없다. 끝나지 않는 동문서답에 에너지를 쏟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문서답을 멈출 수 없는 것은 존재의 본래 모습이 어떤 것인가와 상관없이 존재를 존재시키기 위해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소 과격하다고 생각되는 표현이 있다. 그러나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직면하고 싶지 않다면, 불편한 감정은 뒤로 미뤄두고 싶다면 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

놀라운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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