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의 잠 Aug 10. 2016

부모를 미워할 권리
<미운 우리 새끼>

sbs

성급한 일반화는 어떠한 경우에도 위험하다.

그러나 누구나 일상적으로 자기 기준으로 일반화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선택의 상황에 부딪혔을 때 언제나 가능한 모든 변수, 관련된 모든 사람의 입장과 가치를 고려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은 매우 괘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렇게 변명으로 시작한다.


'미운 우리 새끼'라는 프로그램을 봤다. 어머니들이 장가를 가지 않았거나 이혼을 해서 다시 혼자가 된 아들들의 일상을 지켜본다. 그리고 패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충격적인 것은 이 프로그램의 제목 앞에 '다시 쓰는 육아 일기'라고 설명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 아들들의 나이를 찾아보니 김건모는 68년생, 김제동은 74년생, 허지웅은 79년생이다. 이 나이의 아들을 상대로 '육아'라는 표현을 쓰다니! 왜 우리나라의 부모들은 자식을 독립시키려 하지 않을까? 왜 우리나라의 자식들은 독립하려 하지 않을까?  물론 경제적인 이유로 독립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요즘. 그러나 이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아들들은 충분한 경제적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독립하기에 충분한(넘치는) 나이를 먹었다. 대체 왜 그들의 삶과 선택 속에 부모가 등장해야 하는지?


나는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표현이 정말 싫다. 이 표현은 다양한 맥락 속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는데, 내게는 '굳이 그렇게 딱 딱 선을 긋고 구분할 필요가 있나?'라는 의미로 들리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사회는 '선을 긋는 행위'를 '냉정한', '자기밖에 모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개인이 자기의 영역을 명확히 하고 그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주의는 곧 이기주의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이런 분위기는 모든 직장생활 속에, 사회적 관계 속에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그 정점(어쩌면 시작)은 당연하게도 '가족'이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고 한다. 정말?

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을 '희생'이라고 하지 않는다. 세상에 어떤 자식도 부모에게 낳아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모의 선택이며  아이를 키우는 일은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니 희생이라고 할 수 없다. 이건 너무 냉정한 생각인가?

'아이를 왜 낳아야 하는가'에 대해 내가 들은 적이 있는 답변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면 이렇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힘들지만 그 이상의 기쁨이 생긴다, 아이가 있어야 부부 관계가 유지된다, 아이가 없으면 늙어서 외롭고 기댈 곳이 없다, 아이를 낳아봐야 어른이 된다, 아이를 낳는 것은 본능이다...


내가 들은 이유 중 어떤 것도 자식을 위한 것은 없다. 오로지 부모 자신을 위한 것들 뿐이다. 마치 자식을 위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하나, 들을 적이 있다.


아이에게 이 아름다운 세상과 삶을 경험하게 해주기 위해 태어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별로 아름답지 않다(주관적인 견해이지만, 요즘 나에게 공감하는 사람이 많으리라고 장담한다). 부모는 삶을 경험하는 것이 자식에게 기쁨 일지 슬픔 일지 알 수 없으며 자식이 태어날 기회를 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조차 알 수 없다.


결국, 부모는 자신과 자신의 삶을 위해 아이를 낳는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행위는 희생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이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자식은 자신이 독립할 수 있는 연령에 이르기까지 부모에게 보살핌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식을 키우는 행위를 '희생'이라고 말하며 자식들의 '권리'를 '은혜 입은 것'으로 생각한다.


괘씸한 생각인가? 부모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남이 되라는 것도 아니다. 부모는 부모의 인생을, 자식은 자식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식은 자신이 독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는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겠지만, 보살핌을 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에 그로 인해 그 이후의 삶이 부모에게 종속(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되어서는 안 된다. 부모는 그저 자신의 인생을 살았을 뿐이면서 그것을 희생이라 말하며 자식의 인생에 지나치게 개입해서는 안된다.


우리나라의 살인율은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편이다.(놀랍게도 치안이 아주 좋은 나라다) 그런데 존속살인만은 다른 나라에 비해 많다. 그렇게도 가족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나라에서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가족이라는 이유로 지나치게 밀착된 관계를 형성하고 개인으로서의 삶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문화 때문이다.

사랑이나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묶어 개인으로서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 가족은 서로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솔직히 가족으로부터 상처받지 않은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상처를 입었거나 주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살아간다. 설사 사실을 알더라도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모른 척한다. 모르거나 모른 척한다면 상처는 회복되지 못한다. 살아가면서 상처를 입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상처를 회복할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 지나치게 밀착된 관계는 상처를 회복할 기회마저 박탈한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엄마가 나 때문에 너무 고생을 해서..."


부모가 자식을 키우기 위해 어떤 고생을 했든, 그 삶에 대한 보상은 자식의 의무가 아니다. (부양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그 삶에 대한 정신적 부채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부모가 고생한 것은 자식 때문이 아니고 자신이 결혼과 출산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부모의 삶에 대한 책임은 부모 자신에게 있다. 부모가 자신의 삶을 자식에게 희생했다고 생각하면 보상을 원하게 되고 자식의 삶은 힘겨워진다.


성인이 되고서도 부모로부터 독립할 의지를 갖지 않는 자식들도 많다. 그들이 자신의 편리를 위해 부모의 그늘에 숨어있는 것은 부모의 삶을 힘겹게 만든다. 자식이 부모의 품을 떠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것 역시 부모와의 관계가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삶과 자신의 삶이 각자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당당하게 부모의 품에 있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김건모는 어린아이처럼 장난기 많고 다소 철없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그가 그런 행동을 한다고 해서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그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결혼을 선택하거나 하지 않는 것도 그 자신의 과제이다. 늙은 부모가 그를 '장가보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 어머니는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며느리상까지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

김제동은 처음 만난 소개팅 상대자에게 자신에게 누나가 다섯이라고, 자신이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고 말한다. 소개팅 상대자는 자신도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고 말한다. 대체 왜 처음 만난 사람끼리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두 사람의 만남과 서로의 필요에 가장 우선되는 것이 '부모'였던 것인가.

허지웅은 여자 친구가 생기면 어머니에게 소개하고 딸 같은 역할을 하도록 하게 한다고 했다. 허지웅이 생각하는 자식의 역할은 무엇이길래 자신이 하지 못하는 걸까? 19살 때부터 함께 살지 않아서 어머니와 어색하다는데 어색해서 할 수 없다면 그냥 하지 않으면 될 것을, 다른 여성에게 그것을 시키려는 건 또 뭔가.


나는 오랫동안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들의 고생스러웠던 삶에 대한 대가를 당연하게 나의 몫으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의 삶이 고통스러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 시간의 길이만큼 나는 나의 삶을 살지 못했고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의 상처는 가족관계를 악화시켰다. 아마도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직업상 많은 부모를 만났다. 그들에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었지만, 명백하고 슬프게도 덜 아프고 더 아픈 손가락은 있었다. 부모는 완전하지 않다. 부모도 사람이다. 그들의 완전하지 않음을 '희생'이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다 좋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안 된다. 그들의 완전하지 않음 때문에 생기는 상처는 완전하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인식할 수도 회복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입는 상처도 마찬가지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외면하거나 숨기면 상처는 곪아질 수밖에 없다.


나는 이 글을 시작하며 '나의 생각은 매우 괘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라고 썼다. 사실 나는 아직도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쓰는 것이 몹시 불편하다. 그러나 나는 갖고 싶다. 자식으로서 '부모를 미워할 권리'를. 미운 것은 미워해야, 미워하고 나서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미움은 부모와 나의 삶을 개인의 삶으로 분리해서 볼 때 시작되고 내가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수 있을 때 극복될 것이다.


부부는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해야 하지만 개인으로서 각자의 삶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사랑하고 아껴야겠지만 역시, 개인으로서 각자의 삶을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사랑이나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으로서의 삶을 당연하게 침범하고 침범당하도록 밀착하는 것이 가족이라면, 그 가족이라는 이름은, 누군가에게는 칭칭 동여맨 붕대 속에 감춰진 채 곪아가는 상처일 뿐일 수도 있다.


혼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진작에 독립할 나이를 넘어선 그들이 '육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삶에 대해 부모가 '육아일기'를 써 줄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신의 일기'를 써 가기를 바란다.




덧붙임.

1. 자식에 입장에 치우쳐 쓴 글임을 인정한다. 자식은 부모에게서 나고 자라기 때문에 그들의 가치 체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가족의 관계에 있어서 부모에게 주도권이 있음은 분명하다. 물론 자식이 나이를 먹으면 그 관계가 역전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자식이 가치체계를 형성하는데 부모가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상, 부모의 영향력은 자식에게 내면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2. 이 모든 이야기에서 경제적 문제가 빠져 있음을 인정한다. 현대사회에서 관계를 결정하는데 자본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잘 알고 있다. 경제적인 문제까지 이야기하자면 너무 복잡한 층위가 생겨난다. 여기서는 그저, 심리적인 측면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전 13화 멈출 수 없는 동문서답 <호문쿨루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