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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잠 Jul 18. 2016

굉장한 영화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곡성>

나홍진 / 2016

오랜만에 공포영화를 봤다. <곡성>이다. 보기 전에 일단 별이 몇 개나 달렸는지 봤다. 평이 극단적이다. 대단한 영화라고 칭찬하는 사람, 대체 이게 뭐냐고 짜증내는 사람. 경험적으로 이런 극단적인 평을 받은 영화들은 내 입맛에 맞았다. 오랜만의 기대, 설렘. 굉장한 영화를 만날지도 모른다.



러닝타임이 꽤 긴 영화다. 몰입도 있게 봤다. 그렇지만 뭔가 정리되지 않은 느낌으로 끝이 난다. 왜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 남는 걸까? 여러 가지 해석의 여지를 두는 영화이기 때문에? 아니다.    


영화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악마로 생각되는 존재는 ‘일본’ 사람이고, 그 악마와 대결하겠다고 나타나는 사람은 ‘무속’인(물론 그 일본 악마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으므로 완전히 우리 무속을 표현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이고 다른 것을 탐색해 볼만한 어떤 정보도 없다)이다. 거기다가 악마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려는 착한 귀신이 등장한다. 참, 악마의 존재를 확인하러 나선 사제, 심지어 좀비(어떤 이유로 만들어진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도 등장한다!    


종교라는 건 그것을 선택한 사람의 삶을 통째로 지배하는 철학이다. 선택한 사람에게 종교는, 자신을 규정하고 자신이 속한 세상을 정의하는 가치다. 종교를 배경으로 하는 공포영화가 무서운 이유는 괴기스러운 장면 때문이 아니다. 삶의 기준이 되는 공고한 가치를 가진 존재(신, 혹은 종교 자체)의 실체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 존재는 사실, 인간이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상상 속에서 얼마든지 다른 모습일 수 있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존재가 내가 생각하고 있던 모습이 아닐 때 느끼게 되는 불편과 공포는 상상 이상이다. 그래서 종교를 바탕으로 한 공포영화에서 느껴지는 공포는 갑작스러운 귀신의 등장으로 느끼는 공포와는 완전히 다르다. 칼을 들고 쫓아오는 살인마에게서 느끼는 공포와도 다르다. 단순히 죽음의 순간을 직면한 두려움과 공포가 아니라,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불편, 삶의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속에서도 결코 결론에 이를 수 없는, 끝나지 않는 터널 같은 공포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물론 잘 만들어진 영화에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렇지만 <엑소시스트>를 보고 공포를 느낀다. 영화 속에 형상화되어 있는 세계에 설득당한 나는 나의 관점에 대해 회의하게 된다. 어쩌면 영화 속의 세계가 진짜일지 모른다고 의심한다. 강렬한 소리와 화면에 압도당하면서 그들이 쏟아붓는 질문의 폭포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정말로 이 세상에는 내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저들이 나에게 보여주는 세계가 진실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나의 판단과 선택은 나에게 어떤 결과로 돌아올 것인가.    


<곡성>은 꽤 거칠고 잔인한 장면들이 많이 있었지만 나에게 전혀 공포를 주지 못했다. 도대체 무엇을 무서워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주인공의 가족을 파괴하는 존재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종교적 힌트가 나타나지만 어떤 세계관이 이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어떤 의문을 가져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이런 생각들을 하는 동안 영화는 자기의 시간대로 흘러가 버렸다. 처녀 귀신 이야기에 몰입되고 있는 중에 드라큘라가 나타나고, 드라큘라에게 공포를 느끼려는 순간 좀비가 나타나 버린 것 같은 느낌이랄까.    

기독교와 무속의 대결이나 엇갈림 자체를 중심 소재로 했다면 새로운 영화가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성경을 인용하거나 기독교적 악마의 모습을 끌어다 쓰지 않았다면 혼란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우리나라의 무속 속에서, 신내림이나 빙의를 섬세하게 활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님, 애초에 기독교적인 퇴마에 집중해도 좋았을 것이다.(사실 이건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다. <검은 사제들>을 보라.) 중간에 일본인 악마에 의해 만들어지는 좀비는 정말 없어야 했다.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여자 귀신의 존재도 좀 뜬금없는 느낌이었다. 의심과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는 꼭 귀신이 아니어도 된다.    


의심은 믿음이 있어야 생긴다. 빛이 있어야 어둠이 생기듯. 영화는 ‘의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의심의 전제인 ‘믿음’이나 ‘신념’이 없다. 무엇인가를 믿고 있어야 의심이 생길 수 있다. 그는 대체 무엇을 믿고 있었기에 무엇에 대한 의심을 가지게 된 것인가?    


그렇다고 해도 잘 만든 영화다.

한동안 미친 사람처럼 구할 수 있는 모든 공포 영화를 보던 시절이 있었다. 늘, 우리나라의 공포 영화는 실망이었다. 나는 신파가 싫다. 울고불고할 시간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영화는 신파가 너무 많다. 심지어는 공포영화까지도 신파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신파로 흐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곡성>은 칭찬할 만하다. 어린 딸이 괴물이 되어가는 상황을 막아보려는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신파로 흐르지 않는다. 그는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딸을 구하기 위한 이러저러한 방법을 모색한다. 딸을 망치는 존재의 실체를 쫓으며 그가 느끼는 혼란과 두려움이 관객들에게 잘 전달된다.

배우들의 연기나 장면 구성도 좋았다. 특히 무속인이 굿을 하는 장면은 앞으로 많은 시간이 흘러도 선명한 영상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 같다.

계속되는 반전을 통해 관객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누가 내 편인지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전략도 훌륭하다. 이런 장치는 주인공이 느끼는 혼란과 갈등을 관객들이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관객들은 계속해서 생각하고 추리하고 상상할 수밖에 없다. 관객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는 얼마나 훌륭한 영화인가?    


어쨌든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추리를 했고 긴장을 느꼈다. 하지만 공포를 느낄 수는 없었다. 아쉽다. 지나치게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너무 많은 상상과 생각들이 영화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려운 내용을 어렵게 말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내용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직 자기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려운 내용도 쉬운 언어로 바꾸어 말하고 표현할 수 있다.

어쩌면 관객의 혼란을 의도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공포영화에는 공포를 잊게 하는 혼란이 있어서는 안된다. 혼란으로 인해 더 큰 공포에 이르게 된다면 몰라도.


어디선가 곡성이 들린다. 두려운 마음으로 곡성을 쫒는다. 그런데 길의 끝에는 너무나 화려하고 거대하고 복잡한 미로가 있다. 복잡한 미로 속 길찾기에 압도된 나는 곡성을 향한 공포스러운 상상을 잊는다. 길을 찾는데 온 정신을 빼앗겨 더 이상 곡성이 들리지 않는다.

미로가 아니었다면, 거미줄 친, 무너져가는 집 정도였다면 곡성은 더 선명하고 공포스럽게 들려왔을 것이다.

한 발도 나아갈 수 없을 공포에 휘말려 버렸을지도 모른다. 굉장한 영화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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