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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잠 Sep 01. 2016

되찾을 수 있을까
<마트가 우리에게서 빼앗은 것들>

신승철 / 2016

도시에서 낯선 익명의 사람들 사이에 던져진 이들은 관계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소비를 통해 해결하는데 익숙하다. 또한 그 소비가 생활의 필요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관계를 대체하기 위한 임시방편인지, 이미지-영상에 의해 조작된 것인지도 모호하다. 상품 구매로 이어지는 우리 욕망의 대부분은 혼자서 멍하게 바라본 이미지-영상이 부드럽게 파고들어온 결과라고도 간주할 수 있다. 

마트에서 생산지, 원료, 식품첨가물, 유전자 조작, 윤리적 생산, 제3세계 민중과 노동자에 대한 착취 여부를 꼼꼼히 그리고 깐깐히 따지는 소비자는 거의 없다. 마트가 소비자의 구매를 유도하는데 동원하는 얄팍한 논리는 브랜드와 포장지의 화려함이나 '싸다'는 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묵묵히 상품을 구입하는 소비자들의 모습을 관찰하다 보면 유통대기업이 무척 편리하게 장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마트로 몰려든다. 전통시장, 골목 상권은 마트에 의해 점령당한다. 마트는 늘어나고, 항상 사람들로 넘쳐난다. 시장이 사라질수록 사람들의 선택권은 줄어들어 마트에 갈 수밖에 없으니, 마트는 점점 더 호황을 누린다. 그들이 부자가 될수록 우리는 가난해진다.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다. 우리 사회의 어디에도 자본주의의 그늘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맞다. 마트는 나쁘다. 마트는 우리 사회의 불합리한 시스템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마트에 가는 것은 그 시스템을 인정하는 일이며 심지어 공고히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는 작가의 제안대로 우리의 소비형태를 반성해 보고 건강하게 변화사켜가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별로다. 생각해보니 책을 읽는 내내 혼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마트의 얄팍한 속임수에 속아 미친 듯이 카트에 물건을 쏟아 넣고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는 것만 같았다. 물론, 솔직히, 소비의 목표가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욕망에 몸을 던지는 일이 분명히 있다.(사실은 꽤 많을지도) 그러나 분명히 그보다 많은 경우에 마트에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불합리한 시스템을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변명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트에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많이 생긴다.


옛날처럼 매일 오후 저녁거리를 사러 시장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요즘 얼마나 될까. 퇴근 후에는 시장을 가기 어렵다. 나만 그런가? 시장은 늦도록 문을 열어두지 않는다.

시장에서는 소포장을 팔지 않는다. 두 마리 묶은 고등어 중 한 마리만 팔면 안 되냐고 물었다가 할머니한테 엄청 혼난 적이 있다. 지금의 시장은 옛날의 시장처럼(작가는 전통시장에서 정성과 교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인정으로 가득한 곳이 아니다. 적은 양을 사기 위해서도 많은 양을 사기 위해서도 마트에 가게 된다.

매일 장을 볼 수 없으니 많은 양을 한꺼번에 사야 하는데 그걸 들고 이동하려면 카트가 필요하고 그걸 들고 집에 오려면 차가 필요하다. 차를 가져가려면 주차장이 필요하다. 시장에는 카트도 없고 주차할 곳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카트도 사용할 수 있고 넓은 주차장을 가진 마트에 간다. 

올여름에는 엄청난 폭염 속에서 전기세가 무서워 에어컨을 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마트에 몰려들었다. 

아이를 종일 혼자 돌봐야 하는 엄마는 무료로 놀이방을 이용할 수 있는 마트에 들러 잠시라도 휴식을 취한다.


마트는 자동적인 시장일 따름이다. 여기서 소비자들은 식사시간마다 벨을 울려주다가 나중에는 벨만 울려도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동적인 주체로 설정되어 있다. 마트 입장에서는 항의하거나 분노하거나 간섭하거나 따지거나 꼬치꼬치 물어보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상품을 사고 사라지는 반복적인 행동을 하는 소비자가 얼마나 매력적인가? 기업과 상품의 윤리성이나 안전성을 따지는 필수적이고 깐깐한 소비 행위를 하지 않는 소비자. 그저 자동반응이나 충동구매와 같은 행위에 머무르는 소비자는 마트 자체를 유지하는 토대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파블로프의 개가 아니다. 똑똑하지는 못하지만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다.


대기업이 미워서 외국 브랜드의 노트북을 산 적이 있다. 고장이 났는데 어떻게 해도 수리할 방법이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새 노트북을 사야만 했다. 노트북을 사는 일은 나에게 꽤 큰 부담이다. 그래서  AS가 제일 잘 되는 대기업의 제품을 샀다. 

내비게이션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 싸고 품질이 괜찮아 보이는 중소기업 제품을 샀다. 업데이트를 하려고 했더니 기업이 사라지고 없었다. 역시 눈물을 머금고 새 내비게이션을 구입했다. 내비게이션이 없으면 장님이 되어버리는 나는 가장 이름난 회사의 제품을 살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은 알고 있다. 대기업 중심의 우리 경제가 얼마나 윤리적이지 못한지. 자본가들의 횡포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사실은 내가 마트를 찾거나 대기업 제품을 사는 행위가 그들에게 얼마나 멍청하게 보일지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너무 많다. 


나는 공동주택이 싫다. 빌라도 싫고 아파트도 싫다. 층간소음 때문에 칼부림까지 하면서 왜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아파트에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아파트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전세계약이 만료되었다. 층간소음이 없는, 차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지 않는 집을 찾아 나섰다. 부동산 몇 군데를 돌고 나서 아파트에 열광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욕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없었다. 아파트나 빌라와 같은 공동 주택이 아닌 곳이. 도시 안에서 단독 세대로 살 수 있다는 건, 엄청난 부자라는 뜻이다. 심지어 그런 단독 세대는 전세도 잘 나오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파트에 열광해서가 아니라, 아파트가 아니면 살 곳이 없어서 아파트에 산다. 


마트가 팔지 않는 것들 - 소박한 삶, 소박한 공동체를 꾸릴 권리 / 자발적, 주체적으로 소비할 자격 / 꿈꿀 자유, 사랑할 자유 / 어중이떠중이와 공존하는 법 / 자본의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삶


나는 이런 것들을 사러 마트에 갈 만큼 어리석지 않다. 그렇지만 마트가 빼앗아 버린 것들을 되찾아 올 수 있을 만큼 똑똑하지도 못한 것 같다. 나는 아파트에 살아야 하고  AS에 의존해야 하며 오늘도 퇴근 후에는 문을 닫아 버린 시장 대신 마트에 갈 수밖에 없다.


물론 나와 우리 모두는 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서 원죄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고 이 세계에 대한 책임이 있다. 책임이 있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 (꼭! 투표한다!) 다만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더러 마트에 갈 수밖에 없는 나와 같은 소비자보다는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 간 마트와 불합리한 시스템을 만들고 조정하는 사람들이 죄책감을 갖게 되길 바란다. 그들에게 책임을 묻고 시스템을 개혁하는 것이 먼저다. 그들에게 더 많은 책임이 있음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까지 변명을 늘어놓으며 마트에 가야겠냐고 욕해도 할 말은 없다. 변명이 맞으니까. 나도 이 꼬라지의 사회에 한 몫하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엄마가 그렇게 사 먹지 말라고 했는데도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불량식품을 사 먹은 아이보다 아이들을 유혹하여 불량식품을 팔고 이윤을 챙기는 어른이 몇 천배(몇 만배?)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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