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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잠 Sep 11. 2016

두통을 멈추게 한 <루시>의 깨달음

뤽 베송 / 2014

일주일 이상 두통이 계속되고 있다. 나의 신경증을 잘 아는 사람이 말한다. 생각해 보라고, 분명히 신경 쓰이는 무언가가 있는 거라고. 나는 그걸 찾느라 머리가 더 아파질 것 같아서 찾기 싫다고 말했지만 사실, 짐작 가는 것이 있다. 


태생적으로 피부가 좋지 않은 나는, 꽤 신경 쓰고 있는데도 더 나빠지고 있는 피부를 어쩔 수 없다. 나이를 먹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더 나빠지고 있는 피부와 그것을 뒤집어쓴 나를 보는 일은 나이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만큼의 과거가 생긴다는 일이고, 그 과거의 결과로써 만들어진 나를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기에, 나의 자랑스럽지 않은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점점 더 힘겹다.


<루시>는 확실히 실망스러운 영화다. 도대체 왜 최민식을 캐스팅했는지 알 수 없고(최민식이 연기한 인물은 내면 연기 따위는 필요 없는 캐릭터다), 그가 왜 중국풍의 공간에 있는지 불편하다. 아니, 그보다도 (최민식이 주인공인 것은 아니니까) 도대체 시원하고 강렬한 액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5원소>처럼 우주로 날려 보낼 것 같은 상상력도 없으며 모건 프리먼조차 멋있어 보이지 않을 만큼 캐릭터를 살리지도 못했다. 약간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

그런데, 그래도 영화를 보고 나니 웃음이 났다. 뤽 베송이 이 영화를 왜 찍었는지 알 것 같다. 어쩌면 완전한 오해 인지도 모르지만, 그가 말하고 싶은 무엇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런데 그 무엇은 참 뭐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라서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나 보다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무엇이 나에게 위로가 된다.


내가 이토록 두통에 시달리는 것은 도대체 나라는 사람의 존재가, 나에게 조차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먹고살기 위해, 내가 기여하고 있는 사회가 얼마나 정의로운지 판단하기도 전에, 혹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판단을 하고 나서도 이 사회에 기여할 수밖에 없는 구차함. 좋은 엄마가 되지도 못할 것이고 좋은 딸도 아니며 좋은 아내로서도 부족한 나는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지도 못하다. 내가 생명을 가진 존재로 태어났기에 생명을 유지할 권리가 있다고 합리화하는 것 외에 내 존재의 가치를 뭐라고 주장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죽어버릴 수도 없고(사실 두렵다)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증명할 수 없을 사람들의 말을 그냥 믿어버리지도 못하겠다. 


중요한 것은 <루시>가 뇌를 100%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뇌를 100% 사용하게 됨으로써 깨닫게 된 '무엇'이다. 우주가 시작된 시점으로부터 그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모든 우주의 기억이 세포 속에 담겨있다는 사실. 세포로 이루어진 인간은 개별적인 가치와 상관없이 우주의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존재의 일부라는 것. 그녀가 뇌를 100% 사용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루시'의 모습을 벗어 버린다. 그녀는 스스로를 사라지게 하고 동시에 '어디에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루시'의 모습이 사라졌을 뿐, 그녀를 이루고 있던 것들은 쪼개지고 쪼개져 작아지고 작아져서 흩어짐으로써 모든 곳에 있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잘났고 어떤 사람은 못났고 하는 우리들의 평가는, 그녀가 깨달은 '무엇'의 관점으로 보면 정말 쓸데없는 것이다. 개별적인 인간은 잘남이나 못남과 상관없이 전체를 구성하는 일부일 뿐이다. 어쩌면 잘남과 못남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일지도.(잘남과 못남으로 나눈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분류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층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못난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는 나를 분류 속에 넣기 위해 억지 쓰고 있는 중.) 인간의 진화도, 발전도, 이렇게 생겨먹은 세상도 그저 우주가 가진 질서의 일부일지 모른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을 괴롭히고 심지어 멸망에 이르게 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존재가치를 뭐라고 주장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나는, 루시가 깨달은 '무엇'에 따르면 존재가치를 주장할 필요가 없다. 주장하지 않아도 존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태어나고 죽는 것마저 초월하여 시간을 존재하게 하고 우주를 존재하게 한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그저 하나다.


이 영화가 진지한 과학적 탐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러니 이러한 해석도 결국 나를 정당화하기 위한 억지 주장일 뿐이다. 그래도 영화를 보는 동안 이런 생각에 빠져 잠시라도 나를 주장하고자 애쓰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결국 다시 의문에 빠지고 사라지지 않을 두통 속에 살아야 하겠지만, 뤽 베송의 상상력 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분명 실망스러운 영화였는데, 그러면 뭐 어떤가. 영화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나의 두통은 잠시 멈췄다. 잠시라는 것이 안타깝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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