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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잠 Sep 08. 2016

<노오력>마저 <배신>하는 <피로사회>에 대한 분노

<노오력의 배신> / 창비, <피로사회> / 문학과 지성사

성과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노력의 척도가 된 것이다. 따라서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도덕적으로도, 미학적으로 생존에 대한 의지가 없는 태도로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 되었다. p48<노오력의 배신>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p103<피로사회>

그래서 그렇게 힘들었던 거다. 그래서 그렇게 끝도 없는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던 거다. 열심히 살고 있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신을 증명함으로써 비난받지 않으려고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신을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오력은 개인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p16<노오력의 배신>


나는 노력하고 있었다. 아니, '노오력'하고 있었다. '노오력'은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의미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이지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 수 없는 데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만이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남은' 나는 파괴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자본에 유용한 부속품으로서의 가치를 획득함으로써 살아남았지만 개인으로서의 삶과 가치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자본은 이처럼 개인의 에너지를 소모시키고 그것을 집어삼킴으로써 몸집을 키운다. 그럼에도 자본은 '합의'된 것이고 우리가 '선택'한 체제이기 때문에 면죄부를 얻는다. 우리는 자본의 폭력을 모르거나, 알아도 거부할 수 없는 소모품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폭력은 분쟁이나 갈등의 부정성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동의의 긍정성도 폭력의 원천이 된다. 모든 것을 흡수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본의 전일적 지배는 현재로서는 합의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 속에 빠지는 것이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파국으로 끝날 뿐이다. p101<피로사회>
노오력을 하면 살아남고 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이 아니다. 노오력하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하고 배제된다. 반면 노오력하면 삶은 발가벗겨지고 법 밖으로 추방된다. 생존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배제와 추방이라는 두 죽음 사이의 선택일 뿐이다. p44<노오력의 배신>


자본의 폭력성의 깨닫고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설사 그것이 '합의'된 것이고 우리가 '선택'한 것일지라도. 우리가 '합의'하고 '선택'할 때 희망하거나 기대한 모습은 이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합의'나 '선택'에 대한 책임이 있음은 명백하다. 우리의 사회는 자본의 폭력과 횡포를 모른척하거나 외면한 비겁을 뿌리로하여 성장했기에 그 고통스러운 열매를 감수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우리의 몫이다.


그러나, 이 가엾은 청년들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들은 어떤  '합의'도 '선택'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미 실체가 드러난 자본의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시작을 거부할 수 없다. 기성세대들이 헬조선의 한가운데에서 온몸으로 화염을 견디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꿈을 꾸었던 세대다. 그들의 시작은 절망이 아니었다. 지금의 청년들은 화염에 휩싸일 것을 뻔히 알면서도 헬조선으로 발을 내딛도록 채찍질 당한다. 그들은 지옥불을 향해 가는 공포 속에서 돌아설 수도 도망갈 수도 없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p28<피로사회>
수십 년간의 산업화 과정에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서로 공모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가부장이 열심히 일한다면 모든 개별 가족들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는 믿음 덕분이었다. 이 믿음은 민주화 과정에서 '사회를 정의롭게 만든다면 모든 민중이 차별받지 않을 수 있다'로 바뀌었다. 그런데 두 가지 기획이 모두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된 지금, 청년들이 맞닥뜨린 것은 경제적 위기인 동시에 사회적 위기이다. 다시 말해 '당신이 흙수저라면 경제적 하층민이 될 뿐 아니라 사회적 천민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감 앞에 놓인 것이다. '노력하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다'는 산업화 시대의 명제는 엉뚱하게 뒤집어져 가난한 사람은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다.'라는 비난의 날로 돌아와 경제적 패배자를 사회에서 아웃시켜버린다. p77<노오력의 배신>


군대에서는 티스푼을 주고 구덩이를 완성하라 한다고 했던가. 자본에 지배당하는 사회는 불가능은 없다며 흙수저는 커녕 손가락밖에 가진 것이 없는 그들에게 손톱이 빠지도록 '노오력'하여 구덩이를 완성하라고 채찍질한다. 채찍질 때문에 손톱이 빠지지 않도록 피할 수도 없는 그들은 구덩이를 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다. 결국 손톱은 빠져버릴 것이고, 구덩이는 완성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희망없음을 자책하고 자학하며 우울에 빠진다. 수많은 혐오코드를 통해 스스로를 '벌레'의 위치로 강등시킨다.




그런데 그들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잠시 청년들에게 물어주십시오. 줄줄이 늘어선 초록색 빈 병으로 어지럽혀진 대학가의 술집 취객에게, 외로움을 둘 공간조차 없이 비좁은 고시원의 세입자에게, 자정의 어둠을 몇 달째 지켜온 무표정한 아르바이트생에게, 이 나라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주십시오. 그들은 서슴없이 멸망을 입에 담을 것입니다. 감히 멸망을 말하지만 악의조차 감지되지 않는 평온한 목소리에 당신들은 경악해야 합니다. (중략) 청년들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으며, 불공평한 생존보다는 공평한 파멸을 바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국호를 망각한 백성들처럼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 부릅니다. (중략) 이 나라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지만, 대기업 매출액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을 뿐 기업소득과 개인소득의 격차는 점점 벌어져 OECD 최하위권에 머뭅니다. 오로지 기업만이 암세포처럼 무한히 자라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봅니다. 국민소득이 30만 달러를 돌파하고, 세계 100대 기업 명단이 모두 대한민국으로 채워진들, 우리 각각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도 살 수 없는 높다란 탑을 쌓아올린 뒤 먼발치에서 그 웅장한 풍채를 감상하는게 이 나라 경제의 목표였습니까? p190<노오력의 배신>, 손아람-망국선언문, 경향신문 온라인 판 2015.12.31


그들의 분노가 얼마나 다행이고 다행인가. 그렇게 아무 생각도 못하도록 몰아부치고 아무 말도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는데도 그들은, 온몸으로 분노의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가속화와 활동과잉은 넓은 시간적 지평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때 미래는 현재를 연장시킨 것 정도로 축소되고, 다른 것에 시선을 던질 수 있는 부정적 태도가 싹틀 여지는 전혀 없다. 반면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분노의 전제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선다는 것이다. (중략)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p50<피로사회>
OECD 가입국 중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길고 수면 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답이 없는 나라, 자살률이 가장 높고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에서, 나라를 떠나거나 아니면 남아서 '벌레'가 되는 선택만 있다고 느끼는 청년들이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p192~193<노오력의 배신>


부끄럽고 미안하다.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절망의 뿌리가 나의 비겁에 기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손에 쥐어진 숟가락의 색깔이 정해준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들의 처절한 분노와 비명이 너무나 아프다.


이 글을 읽은 기성세대 중 '그렇다면 왜 구조를 향해 분노하지 않는가'라고 질문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나는 반문하고 싶다. 당신이 그 구조 아니냐고. 당신은 그들의 분노에 귀 기울여 본 적이 있느냐고, 오히려 사방을 막은 채 '왜 더 노력하지 않는가'라며 꾸짖어오지 않았느냐고. 청년들에게 기성세대는 대답 없는 벽과 같다. 벽에 대고 화를 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 낫다. p84~85<노오력의 배신>


우리는 그들의 처절한 분노와 비명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 때는 어쨌고 저쨌고 하는 시대착오적인 조언 따위 집어치우고 우리가 그들을 괴롭히는 구조를 만들고 지탱해 왔던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자본의 그늘을 외면하고 살기 급급했던 우리의 비겁이 이토록 잔인하고 처절한 사회를 만들고 공고히 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할 때 그들은 자신에게 향하는 화를 멈추고 세상을 향해 분노할 수 있으며 그 분노는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들의 분노는 정당하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분노케 한 구조를 아프게 돌아보아야 하고 그들의 더 많은 분노와 새로운 탐색을 지지해야 한다. 우리가 그들에게 안긴 빚에 대하여 용서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또 앞으로 얼마나 많은 빚을 그들에게 안길 것인가. 결국 그들만이 할 수 있다. 썩어빠진 뿌리를 뽑아 버리는 일도, 새싹을 틔우는 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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