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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잠 Sep 13. 2016

다시 시작하는 미래, <칠드런 오브 맨>

알폰소 쿠아론 / 2006

(*약간의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영국이다. 세계가 무정부 상태의 혼란에 빠진 속에서 유일하게 군대에 의해 보호받는 나라. 때문에 수많은 난민들이 몰려든다. 그러나 군대는 영국민을 보호할 뿐 난민들을 보호하는 것은 아니어서 그들은 가축처럼 취급당한다. 군대가 보호하고 있다고는 해도 거리는 온통 내전의 고통 속에서 신음한다. 푸르스름한 회색빛 도시는 끊이지 않는 총성으로 흔들린다. 그러나 무정부 상태나 내전보다 더 심각한 것은 모든 여성이 불임의 상태가 된 것이다. 구체적인 정황이 드러나지 않아 어찌 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도 아이를 낳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아이가 태어난 것은 18년 전. 

 

영화가 보여주는 미래 사회는 난민과 같은 약자들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누릴 수 없는 사회다. 정의롭지 못하고 불온한 구조는 유지되어서는 안 되는 까닭일까. 그들은,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고 시한부의 미래 속에 갇힌 사람들은 절망과 불안 속에서 참혹하게 망가져간다. 2006년, 감독이 영화를 통해 그려냈던 미래 사회의 모습이 10년이 지난 지금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한 것은 우연일까? 


영국은 더 이상의 난민을 수용할 수 없다며 브렉시트를 결정했다. 아베는 군사대국화를 꿈꾸며 강력한 우경화를 추진하고 미국의 유력한 대선 후보인 트럼프는 아메리카니즘(미국 우선주의)을 선포한다. 그들은 더 이상 '함께 사는 것'을 원하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부와 권력의 이면에 그들보다 힘없는 나라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외면하고 그 모든 것들은 다 자기들의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의 것을 챙길수록 그보다 약한 나라들은 두려움에 떨거나 가난에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고통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그 고통과 절망을, 어떤 식으로든 표출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1.24명, 세계 최저 수준이다. 두 사람이 만나 한 명의 아이를 낳는 셈인데, 이런 식이라면 산수 백치인 내가 계산하기에도 인구가 줄어드는 속도는 무시무시하다. 인구절벽이라고 했던가. 저출산의 문제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다. 선진국들은 우리보다 훨씬 앞서 저출산의 문제에 부딪혔고 이러저러한 방법들을 동원하여 출산율을 높이고 있기는 하지만 어느 나라도 심각한 고령화 사회로 가는 것을 멈추기는 어려워 보인다. 끊임없는 경쟁과 소모 속에서 소진되어버린 젊은이들은 더 이상을 아이를 낳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니,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이러한 절망 속에 한 소녀가 배 속에 아기를 품은 채 나타난다. 아이와 함께 희망이나 미래까지도 잃어버린 세계에 나타난 그 소녀가 누더기를 걸친, 검은 피부의 난민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소녀는 아기를 품고 있는 까닭으로 여러 가지 복잡한 정황 속에서도 모든 이에게 희망으로 존재한다. 혼돈 속에서 낳은 아기를 안고 있는 소녀 앞에서 모든 군대는, 모든 반군은 총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들 모두는 그녀와 아기의 생존이 사라져 가는 미래를 되찾기 위한 시작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게 지독한 혼돈과 절망 속에서 미래를 되찾기 위해 살아남아야 할 사람은 권력가가,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이, 부자가 아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잉태한 이는 난민이고, 검은 피부를 가졌으며, 더 이상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을 만큼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영화는 말하고 있다. 우리가 희망을, 사라져 가는 미래를 되찾기 위해서 찾고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소녀는 인류의 미래를 짊어진 '인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미래호를 찾아가기 위해 작은 배에 오른다. 뿌연 안갯속 부표가 떠 있는 바다의 한가운데에 도착했을 때, 아기를 품에 안은 채 홀로 남겨진 그녀 앞에 '미래'라는 이름이 적힌 한 척의 배가 나타난다. 그러나 영화는 그 배의 정체도, 소녀와 아기의 미래도 알려주지 않는다. 영화는 그렇게 끝나고 자막을 올린다. 

그래서 소녀와 아기의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영화는 끝났지만, 그녀의 운명은 아직도 우리의 손에 달렸다. 소녀 앞에 나타난 미래호는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다시 시작하는 미래가 될 수도, 끝없이 바다를 표류하는 미래가 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높은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흥행에 실패했다. 영화는 모른척하고 싶은 아픈 현실을 직면하도록 등을 떠민다. 성찰은 가치로운 것이지만 괴로울 수밖에 없으니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무거운 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을 것이다. 9월 말에 다시 개봉을 한다는데, 영화가 보여준 미래와 더 닮아져 버린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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