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작 에즈반 / 2014
시는 시인의 손을 떠나는 순간,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그것을 읽는 사람들의 수만큼, 무한한 해석으로 새로운 작품이 된다. 시를 읽는 즐거움은 여기에 있다. 상징 속에 담겨있는 세계는 무한한 까닭으로 그 상징을 만나는 사람들의 수만큼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그 세계는 시인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온전히 그 시를 읽는 사람의 세계이기도 하다. 위대한 시 속에는 그 시를 읽는 모든 이의 삶이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주 오랜만에, 시를 닮은, 상징으로 가득한 영화를 만났다.
감독이 만들어낸 사건은 짧고 단순하다. 하나의 사건으로 시작된 삶은 끝없이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놀랍게도 그 간단한 사건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모든 삶을 끌어들인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 간단한 사건이 자신의 삶과 어떻게 닮았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그 사건과 자신의 삶을 연결시키면서 또한,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보았지만 감독에 의해서 정의된 나의 삶을 보았다.
아이와 어른이 어느 순간 한정된 공간에 갇힌다. 문은 사라져 버리고 아무리 헤매어도 결국은 같은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이상한 공간이 그들을 점령한다. 그들은 매일 같은 계단을 오르지만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들은 매일 같은 자판기에서 나오는 똑같은 음식으로 배를 채운다. 그들의 삶은 어제와 오늘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하게 반복된다. 그렇게 살아낸 35년. 어른은 죽고 아이는 어른이 된다. 그리고 문이 생겨난다. 혼자 가 된 그는 문을 열고 나갈 수도, 그냥 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선택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답은 그 어디에도 없다. 결국 그의 선택은 다시 반복되는 35년의 시작일 뿐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죽음으로 그 35년이 끝나게 될 것이다.
사전적 의미의 '사과'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개별적인 사과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사과'는 수많은 사과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 속성을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는 그 수많은, 서로 다른 맛과 모양을 가진 개별적인 사과를 보면서 사전적 의미의 '사과'를 떠올린다. 그래서 그 수많은 사과들은 '사과'라는 정의를 얻고 그렇게 불린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각자의 삶은 완전히 개별적인 것이다. 그 개별적인 삶은 너무다 다양하고 천차만별이어서 어떤 공통점도 발견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각자의 삶을 '삶'이라 부른다. 어떤 이의 삶이든 그것은 '삶'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그 '삶'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 수많은 삶을 '삶'이라 정의하듯이 영화는, 어쩌면 너무나 단순한 '반복'과 '선택'이라는 화두로 그 수많은 개별적 삶들이 결국 '삶'이라는 것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의 삶도 이 영화가 그려내는 '삶' 속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었다.
보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젊은 감독의 통찰이 너무나 놀라웠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영화의 구조가 단순하다고 해서 그려내고 있는 삶의 모습까지 단순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삶'은 상징으로 가득한 시처럼 다시, 수많은 해석으로 개별화된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 영화 속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하겠지만 그들이 발견한 삶은 역시 천차만별이며, 완전히 개별적인 것이다. 그러니 영화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영화처럼 타인의 삶을 간접 체험하게 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있는 나, 자신의 삶을 보여 줄 뿐이다. 결국 영화는 영화를 보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나는 영화를 보았지만 감독에 의해서 정의된 내 삶을 보았다.
그 정의는 교묘하고 섬세하며 좁지만 넓어서 내 삶을 정의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그 정의는 얇지만 두꺼워서 언제나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또 언제나 내 삶이 그 속에 있었다.
오늘 나는 내 삶 속에서 발견되는 '반복'과 '선택'을 되짚어 본다.
그것은 감독에 의해 정의되었지만 온전히 내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