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하고 촘촘한 권력의 계단, 그 가장 아래
영화를 보기 전에 여러 번 망설였다. 분명히, 보고 나면 많이 괴로울 것 같았다. 더구나 우리나라 영화여서, 그 괴로움이 너무 오래갈까 봐 겁이 났다. 넷플릭스에 로그인할 때마다 자꾸 눈이 가는 걸 어쩔 수 없었지만 미루고 미뤘다. 그러다 어느 날, 왠지 마음이 좀 단단하게 느껴지는 날, 드디어, 영화를 봤다.
역시, 괴로웠다. 역시, 그 괴로움이 오래 남았다.
1. 가출 청소년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당연하게도 가출 청소년의 삶이다. 1.5리터 페트병에 가득 찬 담배꽁초, 어둡고 눅눅해 보이는 방, 거기서 끓여먹는 라면, 좁고 더러운 화장실에서의 섹스, 장난처럼 일상적인 폭력, 담배연기 가득한 노래방, 당연한 성매매.
당연히 알고 있는 것이라 해도, 그것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눅눅하고 쿰쿰한 냄새가 화면을 넘어 나올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언젠가 거리에서 잘 차려입은 것처럼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다. 조금 더 보고 나서야 그들의 처지를 짐작할 수 있었는데, 옷의 모양새는 괜찮았지만 위생상태가 좋지 않았다. 손톱이 더럽고 옷도 깨끗하지 않았다. 담배냄새, 진한 화장.
요즘 청소년들의 범죄가 날로 흉포해지니 소년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시대가 변화하고 아이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것을 감안하면 소년법 개정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폐지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그 아이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그들의 책임이 얼마나 될까. 물론 태생부터 악마 같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출하는 청소년들의 대부분은 가정에서 심각한 문제를 겪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문제를 피해 집을 나왔지만 그들은 당장 먹고살아야 하는 더 큰 문제에 부딪히고 만다. 나이가 어린 그들이 정상적으로 취직을 할 수 있을 리 없으니 돈을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박화영의 사연마저도 구체적으로는 보여주지 않는다. 엄마와 문제가 있구나 정도를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영화를 채우는 그 아이들은 모두, 어른이 만든 지옥 같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남았지만 범죄자가 되어 있다.
2. 가출 소녀
가출 청소년들 중에서도 여자 아이들은 남자아이들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놓인다. 함께 생활하는 공간에서 언제든지, 함께하는 또래에게 성적 대상이 된다. 뿐만 아니라 돈을 얻기 위해 너무나 쉽게 성매매의 대상이 된다. 성매매는 언제나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라 그들 주변의 남자아이들이 포주와 같은 역할을 하며 그들을 지배한다. 여자아이들은 자신의 몸을 팔아 돈을 벌지만 그 일조차 남자아이들의 보호(?)를 받아야 가능하기에 남자아이들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여자아이들은 작은 권력이라도 갖기 위해 가장 많은 힘을 가진 남자아이의 여자가 되려고 경쟁하는 상황에까지 몰린다.
성욕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해소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매매를 불법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심지어는 공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매매를 못하게 하면 성범죄가 일어나게 된다는 논리인데, 이것은 스스로 성욕을 가진 모든 남성이 잠재적 성범죄자라고 시인하는 것과 같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남성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충분한 이성을 가지고 있다. 성매매 여성은 쉽게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몸을 매매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세상에 어떤 여성이 성매매를 좋은 돈벌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인가.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은 언제나 인격을 가진 존재로 존중받지 못하고 성적으로 학대받기 십상이며 심지어 여러 가지 물리적 폭력에도 빈번하게 노출된다. 더 좋은 일자리에 대한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면 여성들이 스스로 성매매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최근 유럽에서는 성매매 여성들은 모두 피해자로 보호하고 성매수자만을 처벌하는 노르딕 모델이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 모델이 성매매를 현저하게 감소시키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 사회는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한다.
부모의 폭력을 피해 거리로 나선 소녀들은 먹고살기 위해 성매매의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다.
3. 못생기고 뚱뚱한 가출 소녀
예쁜 여자아이들은 힘을 가진 남자아이들의 여자가 되어 나름의 권력을 누린다. (여기서 권력을 누린다는 것이 어른들의 돈을 뜯어내기 위해 성매매를 빌미로 미끼가 되는 것이니 이걸 권력이라 하기도 민망하지만 그들 내에서는 권력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박화영은 못생기고 뚱뚱하다. 그래서 남자아이들의 여자가 될 수 없다. 그런 그녀는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 '엄마'가 되기를 선택한다.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주고 잠자리를 제공하고(자신의 엄마를 찾아가 협박해서 돈을 얻어 온다) 대신 맞아주기도 한다. 심지어는 대신 성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희생하고 퍼주는 방식으로 무리 속에 남는다.
'니들은 나 아니면 어쩔 뻔 봤냐?'라는 대사를 반복하며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라고 한다.
'엄마'는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주고 잠자리를 제공하고 대신 맞아주는 존재인가? 박화영이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라며 호통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엄마'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너무나 처참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라는 말만 해도 눈물이 난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이런 말이 너무 싫다. 눈물이 나면 안 된다. 가족의 어떤 구성원도 눈물이 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족은 구성원 중 누군가의 희생으로 행복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해서는 더욱더 안된다. 조선시대에는 '열녀'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여성을 죽게 했다. 이렇게나 시대가 변했는데도, 아직도 우리 사회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희생을 당연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한다.
박화영은 살아남기 위해, 앞으로도 먹이고 재우고 입히며, 대신 맞아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엄마'의 아름다운 역할이라 믿으며.
어른만큼 권력을 갖지 못하는 청소년, 그중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가출 청소년, 가출 청소년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열악한 환경에 놓인 여자 아이, 심지어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 박화영.
이 영화는 가출 청소년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가 얼마나 끔찍하고 촘촘한 권력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이 계단의 어디쯤에 있을까. 계단을 오르고 있다면 시선은 언제나 위를 향한다. 그래서 애써 돌아보지 않는다면 내가 선 계단보다 낮은 곳은 볼 수가 없다. 돌아보기는커녕 잠시 멈춰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미친 듯이 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스스로 이러한 구조 속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 조차 쉽지 않다.
그 무시무시한 계단, 그 가장 아래, 박화영. 오래도록 괴로운 기억으로 남을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