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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잠 Nov 26. 2019

이들처럼 사랑한다면

<동백꽃 필 무렵> 

용식이가 말했다.

"나 이제 동백씨 고만 좀 조심시키고 싶어유. 동백씨한테 배달나가지 말라고 할 때도 참 내 기가 차더라고요. 내 자신이. 동백씨가 조심할게 아니라 내가 그놈을 잡으면 되는건디 왜 맨날 동백씨가 몸 사리고 살아야 되냐구유"라고.


대학생 때의 일이다. 두 살 터울인 오빠는 엄마에게 전화로 그냥 외박을 통보했다. 그런데 나는 좀 늦게 들어가도 혼이 나고 외박이라도 하려면 누구랑 외박을 하는 건지 함께 있는 사람과 통화를 하게 해 줘야 허락이 떨어졌다. 엄마는 여자는 늦게 다니면 위험해서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엄마들이 딸들을 조심시키지 말고 아들들을 단속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여자들을 못 다니게 할 게 아니라 남자들을 못 다니게 하면 아주 안전한 세상이 되지 않겠냐고. 뭐 돌아온 대답은 뻔한 것이었다. 왜 사람이 맨날 그렇게 삐딱하냐고. 꼭 그렇게 못되게 말해야겠냐고. 이런 에피소드들이 있을 때마다 부당함을 느끼는 나는 늘 못되고 부정적인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생각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너무나 오래 이런 평가를 받다 보니, 나는 그냥 내가 못되고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돼버렸다. 


그런데 용식이가 그렇게 말을 했다. 

엄마에게 조차 이해받지 못한 마음이었다. 그 마음을 용식이가 이해하고 편을 들어준다. 아무 잘못이 없는 여자들이 조심해야 하는 세상은 부당하다고 저렇게까지 절실하게 말해준다. 꿍! 하고 무언가가 가슴을 치는 느낌이었다. 이 드라마가 왜 이렇게까지 나에게 매력적이었는지 한 번에 이해가 되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용식이가 동백이에게 반한 장면부터가 남다르다. 조용하고 착하기만 한 동백이가 술주정하는 남자들을 상대로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밝히는 장면이었다. 이후에도 용식이는 그녀가 강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더욱 사랑에 빠져들었다. 

강종렬이 동백이에게 필구를 생각해서 다시 돌아오라고 부탁하는 장면에서 용식이는 말한다. 

" 동백씨, 동백씨 원하는 대로 해요. 동백씨 인생 이렇게 누구한테 손목 잡혀 끌려가는 분 아니잖아요. 항상 독고다이 스라소니셨지. 근게 뭐든지유 동백씨가 원하는 대로 해요. 그게 내가 좋아하고 애끼고 존경하는 동백씨니까요." 


용식이는 촌스럽기 그지없고 별로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가 페미니스트 일리도 없고 관심도 없을 것 같다. 그저 동백이를 향한 지극한 사랑이, 그녀에 대한 공감이, 그녀를 둘러싼 편견들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세상을 견뎌내고 있는 그녀를 존경하고 더욱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맞벌이를 하면서도 독박 육아에 집안일까지 모두 짊어지고 사는 여자들을 볼 때마다 늘 궁금했다. 분명 사랑해서 결혼을 했을 그 남편들은 어째서 자신의 아내가 안쓰럽지 않을까. 어떻게 저렇게도 고생하는 모습을 외면할 수 있을까. 남자들이 자신의 연인이나 아내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고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많이 달라질 수 있을 텐데. 용식이가 동백이에 대한 사랑으로 그러했듯이. 


생수통은 왜 남자만 바꾸냐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생수통이 여자에게는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생수통이 여자에게 너무 무거운 이유는 남자를 기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남자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는가?! 남자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얼마나 당연하게 여겨지는가?! 

직장의 여자 동료 중 한 명이 내게 말했다. 자기는 생수통을 바꿀 수 있는데 여자가 생수통을 바꾸면 너무 쎄 보일 것 같아서 안 하게 된다고. 생각해 보면 세상은 힘센 여자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해골처럼 마르지 않으면 관리도 안 한다고 비난해서 밥도 못 먹게 만들지 않는가. 해골처럼 마르고 연약해 보이면서도 생수통은 번쩍번쩍 들 수 있는 여자가 도대체 가능하기는 한가.


남자화장실에 여자들이 들어와 청소하는 것을 개선해야 한다며 큰소리를 내를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남자의 인권도 존중해 달라고 강변했다. 남자화장실 청소를 여자가 하는 이유는 화장실 청소 노동자 중에 남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는 화장실 청소 노동자 중 남자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남자가 없으니 남자를 시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인권의 문제라면 여자가 청소하는 화장실을 쓰는 남자들보다 남자화장실을 청소해야 하는 여자들이 더 분개해야 할 일이다. 


용식이였다면 

동백씨가 들지도 못하게 왜 이렇게 생수통을 무겁게 만들었냐고 했을 것 같다. 

대체 남자들은 다 어디 가고 여자인 동백씨가 남자화장실을 청소하게 만드냐고 했을 것 같다. 


물론 용식이는 허구의 인물이다. 그러니 나를 감동시킨 그의 사랑도 허구다. 그래도 용식이를 보고 있으면 내가 꿈꾸는 세상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성평등 교육을 받고 이론으로 무장할 필요도 없다. 진정으로 공감하고 존중하는 사랑을 한다면, 서로가 겪는 불편과 두려움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더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테니까.


동백이와 용식이의 사랑이 예쁘다. 세상의 편견을 이겨내는 것이 씩씩하고, 사랑을 두고 줄다리기하지 않아서 시원하다. 헤어지자면서 통곡하던 동백이가, 엄마의 병실을 지키는 동백이와 함께 통곡하던 용식이가 너무 애틋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들처럼 사랑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꽃밭일까. 


용식이가 말했다.

"동백씨는 내가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동백이는 동백이가 지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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