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충만함
에필로그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거실에 베란다가 있습니다. 베란다 유리창엔 아이가 넘나들며 남겨놓은 앙증맞은 손자국이 가득합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깨끗한 유리 같아서 수많은 관계와 경험을 겪으며 흔적들이 하나씩 남겠구나. 어떤 흔적은 쉽게 닦이지만, 어떤 흔적은 아무리 닦아도 상처처럼 지워지지 않겠구나―
사실 이 글을 처음 시작할 때, 엄마를 향한 짙은 원망이 깔려있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자, 그 흔적은 더 선명해졌습니다. 아이를 보면서 과거의 나 또한 존재만으로 활짝 피는 꽃 같았을 텐데.. 그런 저를 두고 떠난 엄마를 매정하다, 냉정하다고 단정 짓기엔 너무 심오했습니다. 감정은 오래전에 말라붙었고, 남은 것은 건조하게 굳은 잔유물뿐이었습니다. 그것을 오래된 굳은살처럼, 조용히 한 겹씩 벗겨내듯 써 내려갔습니다.
엄마가 남긴 부재의 흔적, 아빠가 남긴 빚의 흔적, 할아버지가 남긴 유품의 흔적. 어린 시절부터 감당해야 했던 모든 흔적은 너무나 버거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나는 절대로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 원망이 깔린 결심은 애착도, 빚도, 물건도 무조건 비워내는 유일한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대물림의 고리를 끊어내려 발버둥 치던 중, 가장 비워내고 싶었던 할아버지가 남긴 무형의 흔적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저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미니멀리스트'의 탈을 쓴 채, 대물림된 아픔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피해자'로서의 비(否)움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깨달음은 저를 흔들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저는 이제 삶을 죽음으로 이끄는 흔적과 생명을 불어넣는 흔적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려 합니다.
저처럼 가족의 상실과 트라우마, 혹은 빚과 같은 유형·무형의 대물림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은 종종 '피해자'로서의 비(否)움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렇게 삶이 한 방향으로만 기울어진 채 살아가다 보면, 자신이 '주체자'로서 어떤 흔적을 남기고,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조차 잊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어떤 흔적을 대물림할지 자각하는 순간부터 삶의 방향키는 온전히 나의 것이 됩니다.
그렇게 나의 선택 위에 남겨질 흔적들은 더 이상 고통의 반복이 아니라, 사랑과 자각으로 가득한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사회가 강요하는 '소유하지 않을 권리'와 '증명하지 않을 자유'를 되찾는, 우리 모두의 '조용한 혁명'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제가 겪어온 흔적들을 감춰야 할 '치부'로 여겼습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기 위해 꽁꽁 감추고, 깊은 흔적 위에 반듯하고 단정한 삶을 덧씌우며 살아왔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마치 오래된 금니를 벗겨낸 뒤 속에 썩어 있던 것을 마주했을 때처럼 치부가 드러나는 부끄러움과 동시에 묘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치료하면 시원할 걸, 왜 그렇게 오래 끙끙 앓았을까. 숨기는 것이 나를 지켜주는 줄 알았지만 결국 나를 살리는 건, 드러냄이었습니다.
창밖의 노을이 아이의 손자국을 비추며 반짝입니다. 지워지지 않을 것 같던 과거의 아픈 흔적들도 저렇게 빛을 받으면 언젠가는 무지개처럼 빛나는 날이 오겠죠.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어떤 흔적을 물려받았고,
어떤 흔적을 물려주고 싶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