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의 비움
비(否)움이라는 거울
"사진은 그래도 다 남겨놓고 정리해라. 사진은 언제 봐도 추억할 수 있다 아니가."
삼촌과 전화를 끊었다.
'(피해자의) 사진을 왜 남겨야 하지.'
알겠다고 해놓고 결국 사진조차도 빼놓지 않고 다 버렸다.
할아버지의 낡은 일기장 속 '사랑 대물림' 문장, 휴대폰 보관함의 메시지를 본 뒤, 나는 혼란스러웠다. 모든 흔적은 짐이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는 신념에 균열을 일으켰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흔적의 '피해자'였다. 어릴 적 엄마의 자살을 목격한 지울 수 없는 흔적, 책임감 없이 빚만 남긴 아빠의 흔적, 모든 것을 증명하듯 남겨진 할아버지의 방대한 유품 정리. 이 '대물림된 흔적'들은 나를 끊임없이 짓누르고, 타인의 흔적으로 나의 인생을 결정짓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고통을 받아내야 하는 사람이었다.
'피해자'의 비움
나침반이 부서지다
비움은 나의 유일한 신념이자, 내가 만들어낸 정체성이었다. 애착의 부재, 무책임한 아빠의 빚, 할아버지의 방대한 유품이라는 대물림된 흔적들로부터 나를 구원할 유일한 길이라고 착각했다. 피해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운 흔적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흔적 자체를 '오염원'인 것처럼 무작정 비우려 했다.
강박적인 비움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대물림된 불안과 결핍의 또 다른 증상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흔적으로부터 도망치려 했지만, 정작 그 과정에서 흔적을 무조건 부정하는 새로운 형태의 흔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비우는 행위는 병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감정의 회피로 작동할 때, 그것을 또 다른 대물림의 흔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비워야만 괜찮아진다'는 조건부 자기 인정에 익숙해져 있었다.
상실의 기억이 너무 깊어 어떤 흔적도 품을 수 없었다. 기억을 붙들면 아플 테고, 감정을 살피면 주저앉을 것 같았다. 나는 제일 통제하기 쉬운 형태인 '비우고 버리는 것'으로 나를 지키려 했다. 하지만 끝내 버릴 수 없던 것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르며 웃던 그 순간들. 그것은 상처를 넘어선 사랑의 증거였고, 내가 간직해야 하는 흔적이었다.
어쩌면 나는 비우는 행위에 심취해 있었다.
비워내는 내가 단단한 사람이라 믿었고,
그 단단함이 곧 치유라고 착각했다.
“통제감 상실과 회피 전략”
(Loss of Control & Avoidance Coping)
외상을 경험한 사람은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 근본적으로 신뢰를 잃게 된다. 그 결과 “선택”과 “행동”을 통한 자기표현보다는 무기력, 무감각, 비움으로 삶을 버텨내려는 회피 전략(avoidance coping)이 자리잡는다.
이러한 회피는 감정 표현 억제, 감각 차단, 자기분리(dissociation)로 이어져 실질적 ‘비움의 상태’에 빠지게 한다.
흔적은 과거에 있는 것도, 미래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흔적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나는 과거의 흔적을 지우고 비우는 데만 집중했고, 불확실한 미래의 불안을 지우기 위해 모든 가능성을 차단해 버렸다. 정작 내가 외면하고 있던 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살게 하는 것들이었다.
할아버지가 남긴 사랑의 흔적이 없었다면, 이 글은 유·무형의 모든 것을 비워낸 완벽한 미니멀리즘의 선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