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無)형의 흔적

존재의 대물림

by 하야
무(無)형의 흔적

나는 유형의 것들을 비워내며 정리했다. 눈에 보이는 물건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깨끗한 공간과 함께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찾아왔다. 과연 내가 정말 지우고 싶은 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이토록 지우고 싶은 흔적들 속에서 역설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 답은 다시 한번 할아버지로부터 왔다.


낡은 일기장 속 무뚝뚝한 사랑의 대물림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며 발견했던 낡은 일기장. 그 속에서 나는 내 이름 '하야'와 함께 뜻밖의 문장을 발견했다.

"하야하고 같은 운동을 갖는 건 대화가 트인다. 베드밍턴으로 할배 사랑의 대물림하고 싶다. 전수요망. 다음 사회생활이 쉬워질 거야. 취미로!"


할아버지는 생전 내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따뜻한 포옹 한번 해주지 못했던 분이었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였던 할아버지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는 아마 평생 입 밖으로 내지 못할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할아버지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일기장 속에서 그토록 갈구했던 '사랑'이라는 단어를, 그것도 나에게 '대물림'하고 싶다는 진심을 발견했다.


사랑은 꼭 포장된 말로 전해지는 게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말보다 라켓을 쥐었고, 그가 보낸 셔틀콕을 받아쳤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배드민턴 연습 시간은 그저 어색한 몸짓을 주고받는 시간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주고받은 건 단순한 셔틀콕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조용하지만 깊은 응원, 손녀가 세상에 나가 잘 적응하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나를 향한 투박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보관함에 남겨진 마지막 응원

나는 할아버지의 낡은 휴대폰을 정리하다 또 한 번의 '흔적'과 마주했다. 보관함에 저장된 문자 메시지였다. 발신인은 할아버지, 내용은 쓰다만 듯한 문장이었다.

"하야 새해에 파이팅"

뜨거운 눈물이 휴대폰 액정화면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나를 불러 휴대전화 메시지 적는 법을 알려달라고 자주 물으셨다. 나는 어린 마음에 그런 할아버지가 귀찮았다. 쓸데도 없는 거 왜 자꾸 물어보냐고 짜증 내며 외면했다. 할아버지는 왜 쓸데가 없냐며 배워놓으면 언젠간 유용히 사용하지 않겠냐며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나이 든 할아버지를 보면 괜히 슬프고 불안했다. 유일한 가족인 할아버지도 늙고 병들어 나를 떠나겠지. 그런 슬프고 불안한 마음이 항상 짜증으로 표현되었다.


타지에 있는 손녀를 생각하며 침침한 눈으로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을 그 손길을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질 거 같이 아팠다. 후회가 밀려왔다. 할아버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응원하고 계셨다. 그분의 존재가 나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 문자는 단순히 글자가 아니라, 내가 앞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든 힘내라고 속삭이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유형의 소유물과는 달리, 일기장 속의 문장과 문자 메시지는 시간을 초월하여 내게 닿는 진정한 무형의 흔적이었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대물림

'나는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라고 다짐했지만 이미 무형의 흔적은 남아있었다. 그가 내게 물려준 것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였다. 나를 향한 사랑, 세상을 살아갈 지혜를 전하려 했던 마음, 그리고 조건 없는 응원. 그것은 소유할 수도 사라지게 할 수도 없는 진정한 유산이었다.


'하야, 존재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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