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실컨설턴트 Mar 06. 2019

누구나 루저가 된다

누구나 한 번 루저가 되어야 한다면, 나는 행복한 루저를 준비하고 싶다.

줄무늬 애벌레는 사방으로부터 밀리고 채이고 밟히고 했습니다. 밟고 올라서느냐, 밟혀 짓 눌리느냐입니다. 그는 밟고 올라섰습니다. 그 기둥 더미 속에서는 이제 친구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하나의 위협이요 장애물일 뿐이며 동료들을 발판으로 삼고 기회로 이용하여 올라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올라가야 겠다.'는 일념이 도움이 되었는지 줄무늬 애벌레는 상당히 높이 올라온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자기 자리를 가까스로 지키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 中에서]


그 날은 그룹의 임원발표를 하루 앞둔 날이었습니다. 그는 초조해 보였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새로운 임원이 발표되면 그 수만큼 기존의 임원은 집으로 가야 하니까요. 임원들이 가장 민감한 시기여서 다들 조심하는 기간입니다.

하필 그날, 제가 전무님과 저녁식사를 하게 됐습니다. 수행하는 부장 한 분과 저, 이렇게 세 명이 한식집 방에서 조용히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왜 제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안 납니다. 그날 기억나는건 제가 던진 하나의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전무님의 답이었습니다. 음식에 못 먹을 것이 섞여 있었는지, 아니면 연가시같은 기생충에 감염되서 내 뇌를 누가 조종했는지, 불쑥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전무님, 전무님쯤 되시면 회사에서 잘라도 덤덤하지 않으세요?"

진짜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전무님은 잠시 멈칫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시고,

"주대리, 자네 얼마받나?"

"다 합치면 5천 정도 될거 같습니다."

"그럼, 그룹 부회장님은 어느 정도 받으실거 같나?"

"50억쯤? 100억인가요?"

"그래, 50억이라 치고 당신이랑 얼마 차이나나?"

"100배요."

"그럼 누가 더 아쉬울까?"


저는 그 시간 이후 조용히 밥만 퍼먹었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단순히 생각했습니다. 높이 올라가면 지위에 대한 미련이 줄어들 것이고, 그 과정에서 돈도 많이 모아놓았을 것이니 당장 그만 두더라도 사는데 걱정 없을거다. 그러니 미련이 적을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논리로 생각한거죠.

그런데 사람은 그런 존재가 아닌겁니다. 마치 동료, 이웃 애벌레로 쌓아돌려진 기둥을 기어오르는 줄무늬 애벌레같은 존재입니다. 왜 오르는지도 모르면서 기둥을 기어 오르지만, 뒤지는 것은 참지 못합니다. 더 무서운건 기어오른 꼭데기에 뭐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철 없어서 가능했던 저 맹랑쾌활한 사건 후로 벌써 10이 넘게 지났습니다. 그 전무님은 몇 년전 퇴임을 하셨고, 저는 얼마간 동료들 머리도 밟고, 밀치기도 하면서 꽤 빨리 기둥을 기어 올랐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전무님이 우울증 치료를 받고 계시다는 소식과 함께 저는 3년째 부장진급 누락 중입니다.

회사가 되었든, 국가기관이 되었든 어떤 조직에 속한 이상, 기둥을 기어 오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기어오르더라도, 기어오를수밖에 없다면, 잠시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여기 왜 있는지? 왜 기어오르고 있는지?

저 꼭데기에는 뭐가 있는지? 꼭데기에 서면 뭘 한건지?

그래야 그 높이가 어디든 매달린 곳에서 떨어져도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줄무늬 애벌레 이야기의 뒷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줄무늬 애벌레는 잘 기어올라갑니다. 그리고 꼭데기에 다다릅니다.

그의 눈에 보인 것은 그림처럼 자신이 기어오른 기둥같은 것이 수없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성공한 아빠보다 즐거운 아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