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 교통카드 유감

by 안개인듯

남편은 아침부터 좀 들뜬상태였다.


은퇴 이후엔 좀체 일찍 씻는 법이 없는 사람이 일찌감치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었다.

제법 많이 빠지고 가늘어진 가난한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고르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모자를 쓸까? 중절모?”

거울 앞에서 한참 모양을 내던 남편이 욕실로 들어가던 내게 던진 질문이었다.

하긴 그는 늘 외출 전에 모자를 쓸지 말지를 물었다.


“왜? 어디 가?”

생뚱맞은 표정으로 남편에게 물었다.

“농협 가야지. 오늘 무료 교통카드 신청하기로 했잖아.”

‘아!’

생일을 지내고 하루가 지난 월요일이었다.


남편은 내가 국가 공인 노인이 된 것이 마치 축하할 일인 듯 즐거워했다.

남편은 그동안 홀로 노인인 듯해서 외로웠을까? 그래서 마누라를 국가가 빨리 노인으로 지정해주길 간절히 바라던 바였나? 설마 모든 교통수단도 아닌 오직 지하철에만 무료 승차가 가능한 이 카드로 교통비 절약을 꿈꾸었나? 아니면 공짜로 지하철을 이용하는 기쁨이 남달라서 함께 누리고 싶었을까?

어떤 이유였던 간에 난 남편처럼 즐겁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료 교통카드 따위는 필요 없다고 대놓고 맞설 용기도 없었다.

카드를 발급받던 않던 내가 무료 교통카드 발급 대상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무료 교통카드 발급에 대한 국가의 태도였다.

코로나 시국이 되면서 주사를 맞아라 예약을 해라, 또 늙었다고 폐렴 주사를 맞아라, 멀리서 지진이 났으니 어떻게 해라, 얼마 전엔 여권을 바꿔라 어째라 하던 국가는 이 무료 교통카드에 대해선 조용했다.

아마도 그 정도는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모르고 지나가면 그만이란 뜻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잔소리를 놓친 것이었을까?

하여튼 나는 상당히 묘한 마음으로 근처 농협에서 아주 쉽게 카드를 발급받았다.

카드를 발급받아 휴대폰 뒤통수에 꽂아놓고는 최초로 무료 승차를 했다.

비록 경전철이긴 했으나 개찰구에서 카드를 찍고 나가는 기분은 일반 카드와 다르지 않았다.

누가 일부러 카드를 보여 달라고 하지만 않는다면 그 불그스름한 카드를 내보일 일은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경전철의 차창을 내다보며 가는데 얼마 전 지인의 말이 생각났다.

“처음엔 너무 이상했어요. 내가 노인이라니 말야. 그런데 써보니까 너무 좋더라구요. 얼마 전엔 무료 카드를 안 갖고 나와서 그냥 내 신용카드로 찍는데 아깝더라니까! 정말 좋아요. 이 카드.”

그녀는 누가 보기에도 세련미가 철철 흐르는 시니어였다.

자주 비싼 브런치를 즐기고, 홀로 산책을 하다가도 새로운 카페가 생기면 주저 없이 들어가 핸드드립을 주문하는, 사치스러워 보이는 꽃을 사서 화병에 꽂기를 좋아하는 영락없는 부르주아였다.

그녀에 비하면 나의 생활방식은 프롤레타리아에 가까웠다.

그런데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똑같은 무료승차카드를 함께 받아 사용하는 것이다.

오로지 기준은 하나. 만 65세가 지나면 된다는 것.

지하철의 유토피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무료승차 1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습관처럼 네이버 뉴스를 보던 나는 지하철 공사 누적 적자가 어마 무시하단 내용을 읽고 말았다.

그 원인은 노인 무료 승차라는 얘기가 사족처럼 붙어 있었다.


‘도대체 노인들이 얼마나 싸돌아다녀서 이런 사달을 만드는가?’


갑자기 내 붉은 무료 교통카드를 꺼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누가 무료 교통카드를 달라고 했나? 지들이 발급해 주고는 무슨 소리야?’


사실 무료 교통카드를 안 쓰면 그만이었다.

기사를 보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지하철 공사의 적자를 함께 걱정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난 화가 났고 부분적으로 창피했고 가난한 젊은 세대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난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뭐야? 무료 교통카드를 쓰는 노인들 때문에 지하철을 증차하는 것도 아니고 차량을 더 붙여 다니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지하철은 시간표대로 왔다 갔다 하고 그 시간표대로 노인들도 왔다 갔다 할 뿐인데 어떻게 노인들이 그 엄청난 적자의 원흉이라고 하는 걸까? 다만 공짜로 지하철을 타는 노인들이 보기가 싫을 수는 있겠으나 그게 적자와 연결되는 고리는 아니지 않은가?’

나름대로 논리를 펴는 자신을 보며 무료 교통카드를 포기하는 일은 없겠다는 생각에 잠시 씁쓸했으나 곧 회복되었다.


아, 드디어 진정한 노인이 되었군.

스스로 축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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