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게 하라

by 안개인듯

며칠 전에 후배 아버지의 부고를 받았다.

예뻐지려고 쌍꺼풀 수술을 했는데 오히려 미워졌다고 남편이 타박한다고 까르륵 대던 명랑한 후배였다.

후배의 아버지는 요즘의 평균에 비하면 비교적 이른 나이에 가셨다.

“지난주 까지도 거동은 하셨어요. 식사는 안 하셨지만. 음식을 끊으시고는 18일째였고 자리에 누우시고는 사흘 만에 가셨어요.”


후배의 아버지는 비교적 건강하셨는데 얼마 전부터는 전립선 고장으로 화장실엘 하루에 스무 번을 드나드셨다고 했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해보면 하루 종일 화장실만 다니는 삶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죽을 때까지 화장실만 들락거리겠는가. 그러니 나라도 죽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도 죽고 싶은 것과 실제로 죽는 것은 다른 문제일 텐데.

당신의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걸 아신 아버지는 결심하고 딸을 불러 단호하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나를 죽게 하라.”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화장실만 다니는 삶이니 이제 그만 살아야겠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아니, 아버지,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아무것도 안 드시고 돌아가신다고 하세요?”

“내 말대로 해라. 병원에서 콧줄 끼고 천천히 죽고 싶지 않다.”


결국 모든 음식을 끊고 물만 조금씩 드셨는데 그 기간이 18일이었다고 한다.

물론 금식이 길어지면서 통증이 동반될 때는 강력한 진통제를 투여하곤 한 것이 치료의 전부였다고 했다.


18일의 기간 동안 딸과 매일 차분히 하고픈 말씀을 다 나누시고, 다른 가족과도 충분한 이별의 시간을 가지신 후에 조용히 운명하셨다고 했다.




“그렇게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축복이지.”


2주 만에 만난 토요일 모임에서 후배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친구들은 한결같이 부러워했다.

‘이게 부러워할 일인가?’

싶은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마땅히 부러워할 일이었다.


부러움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을 때 칼칼한 목소리가 쳐들어왔다.

“그렇기야 하지만 얼마나 고통스럽겠어? 지켜보는 가족도 그렇고. 그렇게 그냥 굶어 돌아가시겠다는 아버지를 보고만 있을 가족이 얼마나 되겠어? 너라면 그렇게 하겠니?”

그 또한 맞는 말이었다. 목소리대로 성질도 칼칼한 잠실댁이었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해? 단식? 스위스? 그게 선택일 거 같애?”


“선택이 아니면? 뭐, 운명이야?”

잠실댁과는 상대가 안되게 유순한 분당댁이 느리게 되받았다.

“어떻게 사람이 자기 맘대로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그건 오만이야.”

잠실댁은 지지 않았다. 난 그녀가 신앙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말을 종합해보면 신앙이 없다고도 못할 일이었다.


“자살은?”

분당댁에 이어 광주댁도 물음에 꼬리를 잇댔지만 시끄럽기만 한정 없었다.

하여튼 토요일 모임은 갑자기 죽음에 대한 콘퍼런스가 되었고, 우리는 각자의 생각을 가감 없이 떠들어댔고, 결론은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다.


“후배 아버지처럼 죽는 분도 있지만 우리 언니 대장암 수술 마치고 나서 그러더라. ‘5년 시한부네. 그 정도 살면 됐지 뭐.’ 죽음에 대한 자세가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냐?”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 안달이 난 나의 말에 위례댁이 마침표를 찍었다.

“그래, 어차피 우린 시한부야. 각자 알아서 잘 죽자.”


나의 토요일 모임은 30년이 되어가는 묵은 모임이었다.

시작은 30대였고 지금은 그들이 모두 60대가 된 것이다. 20대였던 한 명만 빼곤.


그런데 이 모임에서 죽음이 주제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멤버들 나이가 평균 60이 되면서 죽음은 좀 더 가깝고 평범해졌다.

그동안 부모나 시부모, 혹은 가끔은 친구들의 죽음도 겪었지만 아직 배우자나 우리 멤버들이 죽음에 이른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배우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음까지도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을 우리 모두는 느끼고 있었다.

“죽는 게 사는 것처럼 당연한 거지 뭐. 별날 것도 없는.”


느닷없는 잠실댁의 한 마디에 우리는 모두 말없이 웃었다. 아니, 웃고 싶었다.



그랬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상당히 괜찮은 일이었다.


죽음을 기뻐할 것 까진 아니어도 그다지 슬퍼할 일도 아니라는 것.

죽음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으로 접근해 간다는 것과, 나름 계획까지 세워볼 수 있다는 것.

심지어 ‘나를 죽게 하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

물론 당연히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죽음인 것은 알지만. 하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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