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준비

by 안개인듯

내가 노인인 듯 노인 아닌 노인 같은 노인의 미묘한 상황 속으로 들어온 지 벌써 3년째 접어들었다.


이런 말장난은 이곳 실버아파트에 입주해서 살며 느낄 수밖에 없었던 나의 마음 상태를 절묘하게 표현해 낸 것이라 표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노랫말을 만들어준 이에게 감사를)

사실 이곳에 입주했을 때 받았던 축하 전화에는 그런 것도 있었다.

“사모님, 축하합니다. 이제 젊어질 일은 전혀 없겠네요.”

언제고 현재가 가장 젊은 때이므로 이 말은 틀리지 않았음에도 묘하게 귓속에 남았다.

‘그렇지. 내가 지금 실버아파트에 들어온 거지. 맞는 말이네.’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고 내가 살았던 어떤 곳보다 좋은 환경이었지만 서글펐다.


그래서 기어이 결심하고 싼 가격의 전세로 내놓았다.

우여곡절 끝에 -누구는 운이 좋았다고 했다- 우리의 30평형 새 아파트를 분당의 30년 되어가는 25평 썩은 아파트와 비슷한 가격의 전세가로 거래를 성사시키는 데 성공했다!


진정 추운 겨울에 이사를 하고 싶진 않았지만 무조건 가기로 결정을 했다.



이사 날짜가 잡히자 나는 바로 이사 모드로 돌입했다.


4년 동안 4번째의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사실 정리하고 버리고 할 짐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매일 무엇인가 비웠고 버렸다.

처음에는 단순히 이삿짐을 줄인다는 개념이었으나 아껴 입었던 정장이나 코트, 액세서리, 가방, 신발, 온갖 스카프와 목도리, 심지어 립스틱, 매니큐어 등을 미련 없이 버리는 내 모습에서 어떤 예감을 보았다.

‘나의 과거와 헤어지는구나. 지금보다 젊었던 어제와의 이별.’


은퇴 후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계절마다 한 두 벌의 옷과 신발로 잘 살아냈다.

초상집엘 가는 데 필요한 여름, 겨울 검정색 옷이 한 벌씩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니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있는 것도 버거웠다.

가장 버리고 싶었던 것은 책이었는데 내 책은 다 버린 상태였다. 다만 매일매일 기록해 나간 다이어리 몇 권은 망설이다가 그것도 소각용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나의 흔적을 차마 폐휴지 처리 하기는 어려웠다. 정말 쓸데없이 많고 허접한 남편의 책을 버리고 싶었으나 그렇게 못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남편은 책을 자신의 기록처럼 생각했으니까.

“매일 뭔가 조금씩 버리다 보니까 죽음을 준비하는 기분이야.”


남편은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느냐는 눈빛으로 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이사를 생각하면서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이 솟았던 것이다.

이사할 곳이 새로운 곳도 아니고 30여 년을 살아왔던 동네 근처였다.

또 집은 형편없이 낡고 좁은 데다 수납장도 하나 없는 터라 ‘기대’라고 하기엔 우스웠다.

“당신은 이사 갈 생각을 하면 즐거운 모양이야?”

남편이 신기하단 말투로 물었다.


“즐겁다기보다는 일단 나에게서 떠나고 싶지.”

남편은 다소 어이없고 한심한 눈빛으로 흘깃하고는 TV에 집중했다.

언제나 현재의 삶을 만족해하던 남편은 이곳도 역시 좋아했다.

사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떠돌이 이사 결정을 염려하기도 했다.

나 스스로도 가끔은 의문이었으니 남편은 어떠할까 싶었다.

“우리도 적은 나이는 아니잖아. 내가 벌써 70인데. 몇 년 나가 살다 다시 옵시다.”

눈치를 살피던 남편은 결국 하고픈 말을 내놓았다.

그러나 나는 다시 돌아올 생각은 전혀 없었다.

노년의 삶이 얼마나 지속될지, 건강이 어디까지 버텨줄지 모르니 안정된 곳에서 평안히 살자는 것이 아직은 비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나는 나의 실버아파트와 함께 나의 초기 실버시대이며 차곡차곡 쌓인 과거와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재도 노인이며 앞으로는 더욱 늙어갈 나는 어떻게 전셋집을 전전하는 노년의 삶을 도모하는가.

그것은 알 수 없는 미래에 거는 도박 같은 것일까?

거기에 덧붙여진 노인의 오만함일까?

말하자면 이 나이에 설사 도박에서 망한 들 무엇이 아쉬울까 싶은.


이런저런 생각에 남편의 말을 흘려버린 나는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내일 일을 모르고 살아온 인생인데 몇 년 후에 대한 약속이 뭐 그리 어려울까 싶어서.

“그래요. 한 10년 있다가 다시 옵시다. 둘 다 살아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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