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다 쓴 실버아파트 이야기
다른 때보다 느지막이 먹산을 내려왔다.
겨울로 접어들 무렵이라 날이 짧아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산에는 등산하는 노인들이 확실히 줄었고 4시 이후에는 거의 없었다.
내가 내려올 때에도 오르는 사람들이 있긴 했으나 부부들이거나 혼자인 할아버지들이었다.
바람이 휙 불어왔고 한기가 살짝 느껴졌다.
단지 내 둘레길로 조성된 산책로에는 한두 명씩 할머니들이 천천히 걷고 있었고, 삶을 다
한 가을꽃들은 화단에 선 채 버석거리며 말라가고 있었다.
집 쪽을 향해 비스듬한 내리막을 걸어 내려가며 장갑과 모자를 벗어 배낭에 구겨 넣었다. 눌어붙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는데 엉겨서 아팠다. 짜증을 내며 재차 머리를 빗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지금 산에 가도 괜찮겠소? 너무 늦지 않았나?”
90은 족히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체격은 장대했고 은색 머리카락은 나처럼 엉겨 붙은 것이 곱슬머리인 듯했다. 손에는 등산용 스틱을 들고 있었는데 신발이 실내화였다.
“예. 뭐 가실 수는 있겠지만 많이 어두워질 것 같은데요?”
등산길을 묻는 노인에게 ‘절대 가시면 안 됩니다’라고 얘기하기에는 좀 어중간한 시각이긴 했다. 나이를 생각하면 절대 말리고 싶었지만.
“갈 수는 있으나 어둡겠다? 그럼 안 가는 게 낫다는 얘긴데.”
할아버지는 아예 자리 잡고 이야기할 기세였다.
“산에 가시기엔 신발도 그렇고, 시간도 그렇고 하니 여기 산책로를 도시지요? 다른 분들도 많이 산책하시니까요.”
난 최대한 친절하게 대답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고 피곤한 상태였다.
“그럼 산에 가지 말고 산책을 해라. 여기?”
할아버지는 부정확한 메아리처럼 내 말을 비슷하게 반복했다. 그러자 난 조금 있으면 짜증이 날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화장실에도 가고 싶었다.
“예.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인사로 마무리하고 자리를 벗어나려는 데 할아버지의 말이 또 붙들었다.
“산에 가기엔 시간이 늦었고 신발도 불편하니 산책을 해라. 그 얘기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억지로 웃곤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인내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그래야겠어요. 난 젊고 예쁜 여자 말을 잘 듣거든.”
할아버지는 내게 거수경례하듯 손짓을 하고는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그 뒷모습을 보니 오른쪽 다리를 약간 절고 있었다.
집을 향해 내려오는데 할아버지의 말이 맴돌았다.
‘젊고 예쁜 여자라’
하긴 그런 시절이 있었지. 누구에게나.
할아버지가 근육질 충만한 몸매에 깎은 것 같은 굴곡의 얼굴이었던 때가 있었던 것처럼.
그런데 그때와는 전혀 상관없는 지금의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한 것은 농담인가 실수인가.
사실 굳이 기분 나빠할 얘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현실감 없는 얘기는 기분을 좋게 하지도 않았다.
길을 다 내려와 로비에 들어서는 데 저녁 식사를 하러 오는 노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부부들은 손을 잡고 천천히 오는 경우가 많았고 혼자 오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는 비교적 걸음이 빨랐다.
“저녁 식사 하러 오지 그래요? 나 피곤해서 밥 못하겠어.”
밥은 하기도 먹기도 싫지만 남편은 꼭 먹어야 하는 이런 상황에서 식당만큼 좋은 선택은 없었다. 오늘 뿐만 아니라 남편은 혼자 와서 먹으라고 하면 별말 없이 와서 먹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하고 로비 의자에 앉아 등산 스틱을 짧게 접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옆에 와 앉으셨다.
“아유, 한창인데 여길 빨리 들어오셨네. 이제 60이나 되셨나?”
할머니는 자세가 상당히 곧았고 아주 옅은 분홍색 립스틱을 바른 80대 중반쯤이었다. 펌을 한 은갈색의 머리카락 사이로 밝은 핑크빛의 두피가 곳곳에서 살짝살짝 드러났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60은 넘었고요. 할머니 정말 고우시네요.”
옆으로 비켜 앉으며 할머니의 손을 보니 손톱마다 고운 색깔의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레즈비언으로 오해할 정도의 무지갯빛 색깔들이었다. 대단하시다! 감탄하고 있는데 할머니에게서는 고급스러운 향기까지 은은하게 났다. 무슨 섬유 유연제를 쓰시나 궁금했지만 내가 묻기 전에 할머니가 먼저 시작했다.
“지금이 제일 고울 때야. 젊은 사람이 멋 좀 내고 다녀요. 이렇게 이쁠 때는 금방 지나가거든. 알았죠?”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의 손짓에 부지런히 일어섰다. 아마도 저녁식사를 같이하기로 약속한 모양이었다.
할머니가 가고 나서 옆에 있는 화장실엘 들어가 거울을 봤다. 눌러쓴 모자 사이로 개털 같은 머리카락이 너풀거리며 나와 있고 씻지도 않고 나온 맨얼굴은 황인종의 그것이었다. 핏기도 물기도 없는 입술은 여기저기 말라서 껍질이 허옇게 일어나고 있었다. 한심한 생각에 물로 얼굴을 한 번 씻으니 정신이 좀 나는 듯했다. 물도 털어내지 않고 화장실을 나서는데 출입구 쪽에서 남편이 내게 손을 흔들며 식당을 향해 갔다.
“여보, 나 저녁 먹고 갈게.”
남편은 한 무리의 노인들 속으로 사라졌다. 남편도 노인 속에 섞이니 똑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며 내일부터는 로션이라도 잘 바르고 머리도 단정히 하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옷도 트레이닝복이 아닌 쳐 박아둔 꽃무늬의 홈웨어를 입어야겠다고.
실버 아파트에 입주한 이래 나 스스로 노인이 되어 트레이닝복이나 수면 바지가 교복이었다.
그런데 산책로의 할아버지나 로비의 할머니는 그럴 일이 아니라고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의 현재를 예쁘고 젊다고 봐준 노인들은 분명히 나의 시간을 지나간 분들이었다.
그러니 그분들이 굳이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 늙음을 앞당기지 말라는 사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 사인을 알아차려야 하지 않을까.
내일은 예쁘게 꾸미고 식당 앞에서 고운 할머니를 기다려봐야 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