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노(老老) 양보

by 안개인듯

조카가 카페를 개업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과 함께 들러보기로 한 날이었다.

100개가 문을 열면 200개가 문을 닫는다는 카페 생태계의 소문을 익히 들었던 터라 내심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지난번에 가려던 우리 동네 투O 카페는 사람이 엄청나던데. 그런 곳도 있으니 개업도 하는 거겠지?”

지하철에서 내려 카페로 가는데 나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분명한 남편의 말이 바람에 흩어져 버렸다.

“그런데 그 건너편 투O을 내가 어제 봤는데 텅텅 비었더라. 빈익빈 부익부인 거 같아.”

남편의 의중에다 완전 찬물을 끼얹었지만 그다지 문제는 없었다.

남편은 언제나처럼 나보다 대여섯 걸음을 앞서서 걷고 있었으니 내 말도 공중으로 날아갔음이 분명했다.

조카의 카페는 작았지만 그래서 아담 조촐했고 깔끔한 인테리어로 ‘새로 개업‘한 티가 죽죽 나고 있었다.

나와 남편과 남편의 여동생이자 조카의 엄마이며 나의 시누이인 노인네 셋은 커피와 쿠키를 먹었다.

커피는 거침없이 맛있었고 쿠키도 수제냄새가 폴폴 났다.

“커피콩을 좋은 걸 쓰니까 남는 게 없어요. 요샌 커피가 무한 경쟁이라 그렇다고 비싸게 받을 수도 없고. 하여간 맨날 스트레스야. 일도 일이지만 수익을 내야 하니까.”

중노인이지만 언제나 소녀 같은 머리 모양과 몸매를 유지하는 시누이는 얼핏 보기에 조카의 엄마라기보다는 연상의 여자 친구 같았다. 허약하게 태어난 아들에 대한 연민인지 시누이와 조카 사이는 일반적인 모자관계보다는 훨씬 살가웠다. 딸이 없이 아들만 둘을 키운 시누이에게는 딸 같은 아들이 각별하긴 했을 것이다.


우리가 커피와 쿠키를 먹고 떠드는 동안 카페에는 손님들이 제법 드나들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근처 직장인들이 식사 후에 테이크아웃 커피를 사러 와서 바빠질 때에 우리 부부는 카페를 나왔다.

“고모는 언제까지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거야? 고모도 이제 환갑 넘은 나이잖아.”

아들과 직원 둘의 점심을 싸서 나르고 쿠키 재료를 위해 각종 잼이나 청을 집에서 직접 만든다는 시누이 역시 자기 일 때문에 늘 바쁜 사람이었다.

나는 시집 식구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넓게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큰 시누이의 고생은 맘에 걸렸다. 결혼 후 어느 한날이고 편한 세월이 없던 시누이였다.

“자리 잡을 때까지는 해주고 싶겠지. 부모 마음이 안 그렇겠어? 당신도 애들 사업할 때 도시락 싸서 날랐잖아. 할 만하니까 하는 거지 뭐.”

남편은 자기 여동생인데도 태평했다. 하긴 나한테도 태평했다.

지나온 길을 되짚어 걸어서 우리는 지하철에 올라탔고 낮임에도 불구하고 빈자리는 없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절대로 자리 찾으려고 두리번거리지 말아요.”

남편에게 노인네 티 내지 말라고 누누이 잔소리했던 터라 남편은 시선을 고정하고 멀쩡하니 손잡이를 잡고 섰다.

우리가 서있는 앞 좌석에는 공교롭게도 노인 셋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마도 경로석이 만석이었을 테니까.

모자와 마스크와 코트의 깃으로 얼굴의 대부분을 차단한 나와, 마스크에 중절모를 쓰고 무테안경을 쓴 남편은 앞의 노인들보다 더 늙어 보이진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한 정거장을 지났을까 내 앞의 남자 노인이 벌떡 일어났다. 자세히 보니 남편보다는 다소 젊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사실은 알 수 없으나.

내 앞의 좌석이었고 남편은 오른쪽에 서 있었으니 상식적으로 내가 앉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나의 왼쪽에 서 있던 청년이 거의 밀치듯이 돌진해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뭐, 그다지 드문 일도 아니고 해서 난 남편과 여전히 잘 서 있었다. 문제는 자리에서 일어난 중노인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저래. 노인 양반 앉으시라고 내가 일어났는데 지가 와서 앉네.”

중노인은 지하철 좌석 쇠기둥 옆에 서 있던 자신의 친구인 듯한 또래의 노인에게 속삭이듯 말했으나 근처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데시벨이었다. 중노인의 친구는 핸드폰에서 눈을 잠깐 돌려 불만에 가득 찬 친구를 보고 가볍게 웃었다. 그러려니 해라 하는 의미 같았다.

그 순간 민망해져야 하는 것은 남편과 청년과 남편의 마누라인 나였다.

“아유,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멀리 가지 않아요.”

남편은 일어선 중노인에게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누구도 미안할 일은 아니었는데 나는 왜 창피함을 느꼈을까. 그리고 순간 나는 청년이 못 되게 굴며 노인네 욕을 한다거나 혹은 벌떡 일어나서 양보를 한다거나 하면 어떡하나 하고 약간 긴장되었다. 그러나 청년은 무안해하며 눈을 감지도 않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러자 이번엔 청년의 오른쪽에 앉아있던 여자 노인이 일어섰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남편이 그랬다.

“아, 아주머니, 괜찮습니다. 그냥 앉아 가세요.”

남편이 먼저 나서서 자리를 사양했다. 그러자 내 나이 또래의 할머니는 가볍고 허스키한 소리로 자기는 지금 내린다고 했다. 그래서 남편을 할머니의 그 자리에 앉혔건만 아까의 중노인은 혀를 쯧쯧 차며 여전히 청년에게 불만을 뱉어냈다.

“노인네들보다 못해. 젊은 애들이 뭘 몰라도 한참 몰라요.”

아니, 저 아저씨는 청년이 화를 내면 어쩌려고 저러시나? 일의 잘잘못을 떠나서 젊은이와 노인이 얽히면 마음 상하고 남우세스러워지는 것은 당연히 노인인데. 나는 은근히 젊은이의 반응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청년은 여전히 편안한 눈빛과 자세로 앉아있었다.

‘쟤도 고수네. 그런데 왜 난 쟤 눈치를 보고 있는 거야?’

청년의 무반응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화가 났다. 그러는 중에도 계속 이어지는 중노인의 공격이 좀 과하다 싶은 생각이 들 무렵 중노인은 마지막 말을 내뱉곤 내렸다.

“노노 양보야. 우리끼리 양보하고 살아야지, 젊은 애들한테는 기대를 말아야지.”

중노인이 뭐라고 하던 지하철 내의 사람들은 아무 반응도 당연히 관심도 없었다.

이런 일을 수시로 보고 겪는 모양인 듯. 그저 온전히 핸드폰의 세계였다.


지하철을 내려서 집을 향해 걷는데 남편의 반응이 궁금해 물었다.


“자기는 아무렇지 않았어요? 난 민망해 죽는 줄 알았네. 그 젊은 애가 난리 칠까 봐 걱정도 되고. 그리고 그 노인네는 1절만 하지 계속 3절까지 하더라고.”

“아, 걔가 피곤했나 보지. 종점서부터 계속 서서 왔는지도 모르잖아. 그럼 얼마나 다리가 아프고 앉고 싶었겠어.”

남편의 해석은 역시 그다웠다.

“뭐, 그럴 수도 있겠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을까? 도사인 줄 알았어.”

나는 빈정거리듯 말을 에둘렀다.

“그 청년한테는 아저씨 말이 안 들렸을 수도 있지. 집중하지 않으면 안 들리잖아.”

생각지 않은 남편의 말에 난 살짝 놀랐다. 평소에 남편이 내 말을 못 알아듣고 동문서답을 할 때마다 ‘집중하시라’고 잔소리를 했던 것이다.

“어쨌든, 노노 양보를 받으신 기분이 어떠신지?”

남편이 앉은 자리는 할머니 자리였지만 처음에 양보한 이는 중노인이었기에 진정으로 궁금했다.

“난 젊은이한테 양보받는 것보다 낫던데? 왜 그런지 애들한테는 빚진 거 같아서 말야.”

대답은 남편이 했지만 내 생각도 그랬다.

하긴 젊다는 이유만으로 양보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은가.

그럼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눈치를 볼 일도 아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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