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법인 주소 이모부네 집으로 옮겼어요.”
점심시간이 채 되기 전인데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난 가슴이 철렁했다. 이 시간에 웬일일까. 근무 시간엔 물론 퇴근 이후에도 전화라곤 도통 없는 아이였다.
“너 뭐, 회사 안 갔니?
쌀 씻던 손을 얼른 앞치마에 문지르는데 불안감이 확 덮쳐왔다.
“아니요. 오늘 월차 내고 법무사에 가서 우리 회사 법인 옮겼다고요. 회사 그만둔 줄 알고요?”
아들도 내 불안을 눈치채고 슬쩍 웃으며 넘어갔다.
“아니, 이젠 주소를 네 집으로 해야지 왜 이모부야?”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회사를 차렸고 10여 년 만에 문을 닫았다. 닫았다기보다는 개점휴업이 맞을 것이다. 회사의 이름은 있으나 일은 없으니 대표고 나발이고 굶게 생겼는데 어쩔 것인가. 결국 중견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아들이 말한 법인은 자기 회사를 말한 것이다.
“야, 아예 폐업신고를 하지 뭘 또 옮겨? 언제 또 사업하려고 그러니?”
사업이라면 넌더리가 난 잔소리로 들어갔다. 그렇다고 우리 남편이 사업을 했다는 건 아니다. 그의 형제들이 했을 뿐.
“엄마, 폐업이 더 돈이 들어가요. 그냥 놔둬야지.”
아들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아들의 사업체 주소는 본래 내 집으로 되어 있었는데 내가 이사를 하는 바람에 주소를 빼야 했다. 그런데 자기 집으로도 못하는 게 나나 아들이나 전세였기 때문이다. 법인 주소는 자가여야만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래서 아들은 고민 끝에 그나마 작은 집이라도 갖고 있는 제 누나에게로 옮기겠다고 했었다.
“왜 누나한테 안 했어?”
“아, 서울보단 경기도가 같은 권역이라 좀 더 싸더라고요.”
아들의 이야기는 그랬으나 딸에게 전화해 본 결과는 달랐다. 좀 예민하고 걱정이 앞서는 성격의 딸은 법인 주소가 자신의 집으로 될 경우 집으로 날아올 회사의 우편물이 싫었다고 했다.
“우편물이 없으면 별 상관없는데...... 난 우편물이나 소포 그런 거 오면 주소 다 오려내고 처리해야 하는 그런 게 신경 쓰여서 그랬거든. 그냥 우리 집으로 하라고 해야겠다.”
물론 눈치 빠른 아들은 알아서 이모부 쪽으로 돌렸지만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역시 세대차이는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 아이들은 큰 애고 작은 애고 똑같이 보증을 선다거나 금전거래를 한다거나 하는 것은 형제간에 할 일이 아니라고 딱 선을 그었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애들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친구들도 같은 얘기를 했었다. 처음에 서운하고 말 일이지 관계마저 무너뜨릴 수 있는 게 보증이나 금전 문제라는 것이다.
그건 동서고금의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자주 허물어지는 허약한 둑 같은 것인가.
“그런 거 보면 엄마는 대단해. 아직까지 외삼촌 독촉장 받고 있죠?”
아들은 자주 나를 놀려대곤 했다.
며칠 전에도 전라도 광주에서 왔다는 사람이 친정 동생의 우편물을 가지고 와서 동생을 찾았다.
“꼭 좀 전해 주시면 좋겠어요. 제가 멀리서 와서요.”
체격이 좋고 인상도 후덕한 40대 중반의 남자는 문을 빼꼼 열고 우편물을 받아 든 나에게 부탁했다.
“저도 동생을 못 보니 전해드린다고 확신할 수는 없네요. 그런데 이런 게 별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왜 계속 오시고, 보내고 하시나요? 얘는 바지사장이었고, 당연히 지금 신용불량자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 못 갚을 거 다 아시는 거 아닌가요?”
“그래도 위에서 보내니 저도 어쩔 수 없답니다.”
광주 남자는 자기가 잘못한 것 같이 주눅 들어 대답했다.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동생에게 오는 채무 관련 서류는 광주에서 오는 것뿐만 아니었다. 서울에서, 세종에서, 부산에서 하여간 전국구였다. 아마 통일된 나라였다면 평양이나 신의주에서도 오지 않았을까? 채무액도 어마어마해서 나의 소시민적 돈 개념으로는 이해가 어려웠다. 동생에게는 채권자들뿐만 아니라 법원에서도 어지간히 많은 문서를 보내왔다. 동생의 주민등록이 우리 집으로 되어 있으니 이사할 때마다 우편물도 열심히 따라왔다. IT강국에서 이사 간 주소를 알아내는 것은 오징어 씹어 먹기보다 수월했으리라.
아이들의 생각에는 내가 동생의 주소를 계속 가지고 다니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엄마는 왜 이런 쓸데없는 일로 정신 소모를 하는 걸까 외삼촌한테 깨끗이 정리해 가라고 하면 될 텐데.
그런데 난 그러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물며,
사업을 하는 시동생 회사에 집을 저당해 준 일이 있었다. 당시 애들은 초등학생이었고 우리는 맞벌이를 해야만 살림이 가능했다. 당연히 저금이고 현금이고 없었고 결혼 10여 년 만에 분양받은 아파트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때는 IMF로 수많은 회사들이 도산하던 때였다.
“그냥 해 드립시다. 회사 망하면 우리도 같이 망하는 거지 뭐.”
주변에서는 미쳤느냐, 정신이 나갔다, 왜 후회할 짓을 하느냐는 둥 참 말이 많았다. 그래서 사실 친정 부모님이나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말도 하지 못했다.
다행히 회사는 살아났고 우리는 계속 그 집에서 살 수 있었다.
만일 지금 비슷한 상황이 되면 절대 ‘노!’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젊었고 망한다 하더라도 다시 일어날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
그런데 이런 일이 나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주변에서 심심찮게 형제 때문에 혹은, 부모나 자식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나는 물론 신용불량자는 아니지만 여전히 동생의 부도금액 독촉 서류를 받고 있고 또 내 친구는 아버지가 진 빚을 늙도록 갚고 있다. 또 다른 지인은 언니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되었다가 10년 만에 구제되기도 했다. 물론 보증을 자의로 섰거나 누군가를 대신해서 빚쟁이가 되거나 바지사장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라고 해서 동생의 채무 서류를 끊임없이 받고 싶었을까. 10여 년의 서류를 합치면 여행가방 3개는 족히 나올 것이다.
그렇다고 ‘누나, 주민등록 좀 부탁해.’라고 하는 데 이를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또한 바지사장을 거절하지 못했던 동생은 무엇이었을까?
‘이번 한 번만 도와주면 더 이상은 없을 거예요.’라고 읍소하는 피붙이를 어떻게 모른 척한단 말인가.
그래서 특별히 IMF를 겪어야 했던 우리 세대는 신용불량자도 많고 파산자도 많고 빚쟁이도 많고 바지사장도 많은가 보다.
글쎄, 거절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일까. 그런데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 일종의 의문이 생긴다.
그보다는 가족 간 친구 간 유대의 마지막 매듭이 우리 아니었을까 하는 비합리적인 의심.
아니면 선배들이 그랬듯이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면 겪어야 하는 그런 것일까.
어쨌든 이런 일은 우리 세대가 거의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그래야 하고.
그런데 어렵다.
누군가의 청을 거절해야 한다는 그 마음을 갖기가.
그리고 어렵사리 부탁을 한 사람에게 오히려 미안해한다.
소위 꼰대라고 하는 우리 세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