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 누스바움 <<시적 정의>>
'본방 사수'를 하는 드라마가 있다. <비밀의 숲>이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황시목 검사는 감정 기능을 상실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 일상 생활이 가능하지만, 타인과 정서적 교류를 하지 못하는 '경미한 소시오패스형 인간'에 해당한다.
황시목 검사는 남을 돕지 않지만, 신세질 일도 만들지 않는다. 당연히 인간 관계에서 부채 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검찰내 학연, 지연, 혈연 같은 복잡한 연고(緣故)에 얽매이거나 '줄서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수사와 기소를 할 때도 주위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 드라마 속 황시목 검사는 염결함의 상징과도 같은 캐릭터다. 법조 비리에 지친 시청자들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범인만을 쫓는 황시목 검사를 바라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황시목 검사의 또 다른 매력은 그가 상당히 유능하다는 점이다. 황시목 검사는 감정 기능을 제외한 다른 두뇌 능력이 뛰어난 인물로 그려진다. 실제로 '소시오패스'가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있다. <나, 소시오패스> 라는 책을 쓴 토머스(필명)라는 미국의 법학 교수는 자신이 소시오패스 였지만, 고등학교 시절 공부가 너무 쉬웠으며 법대 교수와 변호사 생활에서 어려움이 없었노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소시오패스형 인간은 보상에 따라 분비되는 도파민 양이 일반인보다 훨씬 많아서 쾌감이 크고, 따라서 보통 일반인보다 더욱 성공에 집착한다는 가설도 책에 나온다. 굳이 생물학적인 가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소시오패스의 특성인 합리성 추구와 엄격한 자기 절제는 성공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짐작이 든다.
하지만, 감성이 없는 법조인이 정의롭기는 어렵다. 얼핏 단순해보이는 이 언설(言說)을 마사 누스바움은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책 한 권으로 증명했다. 시카고대 로스쿨 교수인 누스바움은 <법과 문학> 강의를 담당하고 있다. 누스바움은 소설을 읽는 독자의 감정과 상상력이 공적 사유와 맺는 관련성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특정한 상황에서 감정이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지는 간단한 상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00만 명 가운데 25명이 굶어죽는다', '10만 명이 항해를 할때 500명이 익사를 했다'는 말을 듣고 청자(聽者)는 생존율이 높다며, 사망자를 통계적으로 무의미한 수치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감정은 사망자에 대해 측은함을 느끼도록 만든다. 누스바움의 말을 빌리자면 "감정은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는 말해주지 않지만,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서 이것들에 관심을 가지도록 한다."
타인에 대한 감정 이입이 논리와 이성의 빈 틈을 메운다. 그리고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타인이 되어 우리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될 때 깊은 성찰이 가능하다. 누스바움은 '분별있는 관찰자'(judicious spectator)가 되기를 요구한다. '분별있는 관찰자'란 눈 앞에 벌어진 사태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능력과 함께 사건에 연루된 당사자들에 대한 깊은 공감 능력을 동시에 가진 사람을 말한다.
누스바움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분별있는 관찰자의 입장을 정립할 수 있게 해준다고 본다. 독자로 하여금 타인의 감정에 빠져들게 만드는 최적의 장치가 바로 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스바움에게 정의는 단순한 정의가 아닌 '시적 정의'다. 문학적 상상력이 뒷받침되는 정의가 이 시대에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다.
<비밀의 숲>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냉철한 이성과 법논리를 벼리기보다 타인에 대한 깊은 공감 능력, 문학적 상상력을 갖춘 검사가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뜻밖에 현실에서든 드라마에서든 신선한 활극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