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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카위빙 바이 경 Aug 31. 2022

결코 사랑해본 적 없는 대상을
향한 최초의 그리움

돌아서는 여름을 반추하며.

2022. 08. 30


네가 너무 싫은 이유를 10가지 대보라고 한다면 난 11가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재작년까지의 나는 그랬으니까. 내가 싫어하든 말든 어김없이 매년 나를 찾아와서 얼마나 힘들게 할지 몰라 지레 겁부터 먹으니 하루하루가 너무 고역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겨우 살아갈 뿐, 직접 그의 계절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랑에 기꺼이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싫다고 밀쳐내며 점점 다가오는 시간에 손사래 치기 바빴다. 이렇다 한들 전혀 애정이 생기질 않으니 그저 소극적인 자세로 방관하며 텁텁한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이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아스팔트를 보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2022 8 29, 새벽부터 후드득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올해는 115 만에 기록적 폭우가 내리면서 특히 중부지방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소란스럽게 내린 비로 인해 큰 피해를 겪으며 이젠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군중들에겐 이 우중(中)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웬만한 비에는 끄떡없는 심리적 내성이 확실히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8 29일에 내린 비는 다른 느낌이다. 뜨거운 안녕을 고하듯이. 이젠 정말 헤어지자며 아롱아롱 이별을 아뢰는 듯한 느낌으로 제법 쌀쌀해진 날씨와 함께 비가 내렸. 짧고 굵은 강렬함으로 여름이 찾아왔다가 다시 떠나가고 있는 느낌이다. 근데 뭐랄까. 왠지 모르게 서운한 마음이 든다. 불나방처럼 뛰어들어 세상에 머리를 처박다가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느낌이다. ‘ 마음이 어떻든 간에 너는 진짜 이기적이야.’라고 생각한 내가 막상 떠나가는 여름의 뒷모습을 보고 거대하게 구멍  공간을 체감하니 이제는 스스로가 이기적으로 느껴진다. ‘여름이가  좋아한다고 했을  싫어한  누군데.’ 라며 나를 에워싸는 공기나 불특정 존재인 제삼자가 아마 나에게 그렇게 말할  있을 정도다.



싫어하는 이유는 너무 많(았)다. 그렇지만 흉흉한 시국으로 인해 바람의 갈증은 더욱 심해졌다. 나라에서 제지하는 것들이 누군가에겐 즐거운 행위였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꺼려했던 것들이어서 더 하고 싶어지는 귀한 마음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물론 그들이나 나 모두 괴로운 마음일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간사하며 심술궂은 개구쟁이 같다. 심지어 나는 그 계절을 가장 싫어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내가 여름과 잘 어울린다고 유독 올해에 입을 모아 말했다. '너를 보면 여름이 먼저 떠올라'며 둘이 닮았다고 한다. 그동안은 겨드랑이와 옆구리, 목과 쇄골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느껴질 때마다 몸을 조금 웅크리며 옷깃을 가볍게 여밀 수 있는 포근한 가을의 특성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글거리고 열정적인 원색의 여름과 많이 닮았다고 했다. 반에 조용하고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은 어떤 애가 사실은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누군가들로부터 꽤 갑작스럽게 흘러타고 온 풍문을 들은 느낌이다. ‘쟤가 대체 나를 왜?’라고 나 스스로가 납득할만한 이유들을 찾으려고 며칠 동안 애쓰고 반추하며 관찰하다가 괜찮은 면면을 발견한 때가 오게 된다. 그게 관심의 시작이고 어느새 사랑으로 이어진다. '설마 내가 쟤를?'이라고 부정하다가 이내 내 마음을 결국 인정하는 것, 내게 여름은 그런 존재가 되었다. 생각지도 않고 하루를 살아가다가 또 문득 두둥실 떠오르고 나도 모르게 상대의 면모에 애정을 느끼게 되고 스며들게 된 것이다.



약 삼일 동안 내린 가을비는 이제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날씨는 더욱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서운한 여름이 그렇게 진짜 떠나가고 있다. 고마운 여름이 추억으로 남겨지고 있다. 외사랑의 과정과 실패,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들었던 연애의 시작, 끊임없는 진로의 방황, 더위로 인해 선잠에서 깬 새벽에 살갗이 쩍쩍 달라붙어 불면증에 시달리는 등 매년 다양하고 때로는 복합적인 성장통을 겪으며 항상 나를 훑고 지나간 한여름의 지독한 기억들은 발 없는 그 계절이 내 눈앞까지 빠른 속도로 훅 찾아올 때마다 괴로운 순간들로 다가왔다. 실낱 같은 관계의 끈을 겨우 쥐고 있는 연인들처럼 뒤돌아서는 여름을 바라보며 ‘진짜 지겨우니까 우리 다신 보지 말자’는 말과 함께 배웅조차 하질 않고 온갖 문은 다 닫아버렸다. 가장 사랑하는 가을과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 더위로부터 반복되는 방해와 해방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심정으로.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대상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그러니 ‘때문에’가 아닌 ‘덕분에’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 마음의 그릇을 갖게 되었고 그 기억들을 그 그릇에 고이 담아 두 손으로 떠받들어 용서하게 되니 낯선 여름에게도 자연스레 하지만 조심스럽게 용기의 손을 뻗고 싶어 진다. 수증기를 내내 품고 있는 더위만 생각하면 여전히 걱정되고 크게 느껴지지만 조금씩 이해하게 되니 다시 찾아올 그 계절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도 생긴다. 어차피 매년 나를 찾아오는 거라면, 그래서 피할 수 없다면 싫어하는 마음보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즐겨야만 하는 이유와 방법을 더 나열할 것이다. 2022년 8월의 가장 마지막 날인 오늘, 회사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데 핸드워시가 없는지 펌프를 빠르게 눌렀다. 손바닥 위로 겨우 찔끔 나오는 투명한 액체 비누를 보며 '또 채우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가장 사랑하는 초가을과 만추(晩秋)를 맞이할 것이다. 이어 뜨거운 계절을 충분히 그리워하며 겨울, 봄까지 살다가 다시 찾아왔을 때는 늘 그렇듯 열렬한 사랑으로 나를 감싸안아주길 바란다. 나 역시 그 계절을 향해 기꺼이 그리고 반갑게 두 팔 뻗어 환영의 포옹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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