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부릎트니 숲이어써 (부제: 만취 기차로드)

18-05-19, 시베리아횡단열차 3일 차

by 역마살아임더

눈을 뜨니 자작나무 숲 한가운데였다.




창문 바로 밑에서 잠이 들기에 고개만 조금 들면 창밖에 보였고, 새하얀 자작나무 숲을 지나가는 풍경은 살면서 처음 보기에 너무 예쁘단 생각을 했지만, 그 생각도 잠시, 흔들리는 요람인 열차 덕분에 잠이 쏟아져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 일어나니 마침 정차역이어서 열차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었다.

이 지역은 간밤에 비가 왔는지 매우 흐리고 땅바닥이 젖어 있었다.



비가 와서 매우 쌀쌀하던 18일 아침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열차에 있으면서 자다 깨 다만 하다 보니 일어나서도 한참이 멍했다.

약간 마취약에 잠들었다가 깬 것 마냥.

그리고 매 순간 마취총 맞은 것 마냥 잠이 들었다.

아침부터 감성 넘치는 척


전날 잠시 들춰본 러시아어 책에서 본 러시아어 아침인사를 맞은편 아줌마가 일어나는 것 같자 바로 건네보았다. 아줌마는 아직 일어날 마음이 없었는지 아침인사만 받아주고 다시 잠이 드셨다.


사실, 아침 여덟 시부터 열차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한국인 할머니와 갑자기 잠에서 깬 나뿐이었다.

나도 다시 누워보자 하고 잠이 들었고, 일어나니 열한 시였다.





창밖을 바라보다 아침을 먹어볼까 하고 전투식량을 꺼내서 뜨거운 물을 부으러 가서 물을 붓다가 갑자기 열차가 코너를 돌면서 자연히 물의 방향도 기울어져서 내 손바닥에 쏟아졌다.


뜨거운 물은 왜 쏟아지면 바로 알아차리질 못할까. 내 손에 뜨거운 물을 붓고도 잠시간 멍했다. 그러다가 뜨거운 물을 부은 걸 알고 난리를 치자 차장도 어떡하냐고 난리를 치면서 너는 앞으로 물을 부을 때 자기한테 말하라며 지지대로 쓰라고 플라스틱 통을 하나 줬다.

그 통에 전투식량을 넣고 물을 부은 후 자리에 갖다 둔 후 다시 돌려주러 가자 어떡하냐는 제스처를 보이길래 어깨를 으쓱하고 화장실에 가서 찬 물을 붓고 있는데, 까먹었다.

내가 탔던 1호차는.... 시설이 매우 열악했다는 게.


나에게 충격과 공포를 줬던 수도꼭지

저렇게 버튼을 눌러야지만 물이 나오는 구조인 데다가 그나마 떨어지는 물도 내가 필요한 만큼 “콸콸”이 아닌 “쪼르륵”이라서 도대체 찬 물을 부어도 내 손에 온전히 가는 느낌은 아니었고, 화기를 식혀줄 순 없었다.


옆 섹션에 있던 한국인 중년 부부에게 혹시 화상연고가 있냐는 의미 없는 물음을 던져보았다.

그들은 화상연고는 없다고 하였고, 할머니들에게도 물어보았으나 그들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네 명의 어른 모두 각자가 가진 뭔가 좋은 온갖 약은 손에 다 발라주며 유난을 떨어주셨다.


갑자기 쏟아지는 관심에 멋쩍어하다 갑자기 세면백에 넣어둔 친구가 줬던 냉시트가 생각이 났다.



얘도 어이없겠지 이렇게 쓰일 줄은 몰라서


애지 간한 짐은 다 캐리어에 넣어서 올려버리고, 열차에 들고 탄 건 음식들, 세면도구와 핸드폰, 책이 끝이었는데 어쩌다 이 세면백에서 냉시트가 있어서 다행이었는지.


예전에 친구가 준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가 보다..... 싶었다.


나는 그런 걸 보면 참 많은 이들의, 내 주변이들의 호의와 선의 위에서 살아가는구나 싶었다.

앞으로도 고마운 사람들에게 잘해야지.


이제까지 그랬듯 낮에 한숨 자고 일어나니 맞은편 아줌마가 내 보조배터리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오늘도 쓸데없이 감성넘치는 책과 보조배터리


어이없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잃어버릴 각오까지 하고 보조배터리를 두 개 들고 왔었기 때문. 그래서 별 신경도 쓰지 않고 괜찮다고 웃어줬다. 아침인사 하나 텄더니 갑자기 훅 들어오시는 게 당황스러웠지만, 무뚝뚝한 러시아인보다는 그래도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게 어딘가 싶었다.


신기하게 잠을 많이 자다 보니 나는 한국에서보다 훨씬 더 여유로운 사람이 되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불안함을 숨기기 위해 눈치는 힘껏 보지만 그걸 숨기기 위해 알게 모르게 뾰족해져 갔다



그렇지만 여행을 하다 만난 사람들은 내가 또 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인지, 원래 성격대로 너그럽게 대할 수 있었다.

쭈뼛거리며 눈치보기보다는 당당함과 서글서글함으로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나만이 남았다.


이번 여행이 채우기보다는 비우는 여행이라면 정말 그 목표에 딱 맞는 모습이 아닌가 싶다. 내가 나를 방어하듯 뒤집어쓰고 있던 내가 알던 내가 아닌 모습들이 비워지고 있었으니


그 덕분에 나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계속 달라지는 나를 보고도 중심을 잡을 수 있고, 나에게 만족하고 집중할 수 있겠지.

이 모든 건 잠을 많이 자면서 생긴 좋은 변화라고 생각했다.



내가 참 좋아하는 웹툰 어쿠스틱라이프의 작가 난다 님께서 전에 그런 일화를 그린 적이 있었다.


낮잠을 오래 잘수록 가장 최근 생긴 자아부터 잃어서 낮잠에서 일어난 후 잃어버린 자아에 대해서 다시 되짚어간다고


나 역시도 잠을 많이 자면서 가장 최근 생긴 뾰족한 자아를 잃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자아를 되찾을 마음은 없었다.

여행을 계속하면서 가장 단단한 나만 남기를.

최근에 생긴 여리고 약한 모습은 더욱 단단해지길.





내가 일어나서 멍 때리며 주변을 살피는 것을 보자 무원이는 다시 내 옆에 앉아서 말을 걸었다.


얘는 참...ㅎ.... 저 옆 열차칸의 다니엘이라는 대만인이 먼저 와서 말 걸어주고 해서 둘이서 중국어로 대화하더니 왜 또 나와 얘기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더라.

심지어 대만인 다니엘은 무원이가 내 옆에서 떠드는 걸 보고 너네 둘이 사귀냐고 말해서 나에게 눈으로 욕먹고, 단호하게 중국어로 아니라고 했는데도 난 다 알지~ㅎ라는 표정으로 뿌듯한 척 우리를 바라봐 더 이상 그만 엮이고 싶었다.


거기에 또다시 내 바이칼 일정을 세심하게 묻길래 마침 맥주가 먹고 싶었던 나는 다니엘과 무원이에게 맥주 먹으러 갈래?라는 뜬금없는 말로 대화 끊기를 시도해 보았고, 먼저 가있으라는 다니엘의 말에 무원이와 나의 열차 여행은 시작되었다.


3등석을 지나 2등석으로


우리는 3등석들을 지나 2등석으로, 그리고 식당칸으로 갔다.

수많은 한국인 블로거들도 말했듯이 식당칸의 가격은 비싸다.

물론 러시아 시내와 비교하였을 때.


하지만 러시아 물가가 매우 싼 것을 생각하면 한국의 열차칸보다는 훨씬 싼 가격.


그래서 마음 편하게 맥주 두병과 땅콩을 시켰고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별다른 말은 없었었다. 왜 같이 오기로 했던 다니엘은 안 오는 건지,

비싼이유는 직접 땅콩을 접시에 놔줘서인가..?

왜 다니엘은 너랑 나랑 사귄다고 생각하는 건지, 너는 어디까지 가는 건지.


그런 그냥 쓸데없는 얘기를 하다 문득 나에게 무원이가 물어보았다.

다음번에 취직하면 어디로 할 건지, 여전히 다시 광고회사로 갈 것인지.

갑자기 이렇게 내 앞날에 들어온다는 게 당황스러웠지만, 아직 정한 것은 없기에 그냥 정한 게 없다고 솔직히 말했다.

내가 이제 그만둔 지 한 달도 안됐고, 머리를 비우기 위해 출발한 여행인데 아직 반도 안 지났고. 벌써 급하게 생각하고싶진 않다고 말했다.

근데 무례하다는 생각과 함께 허를 찔린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그건 내내 하고 있던 고민이었기 때문일까.

여행가는걸 좋아하니 여행사에 취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외국어를 남들보다 빨리 익히니까 그걸 이용한 직업을 할까, 아니면 수많은 알바를 통해 깨달은 나의 천직(이지만 인정하기 싫은) 서비스직을 할것인지 등등.



그 와중에 충격적인(!!) 얘기도 들었다.

다름아닌, 그는 지금 열차에 탄 이래로 한번도 씻지 못했다는것(!)

화장실 수도꼭지 사용법을 몰라 씻지 못했다길래 그치...어려울만도 하지 싶어서 가는 길에 알려주겠다고 했고,


꽤나 씻고 싶었던건지 그럼 갈래? 라는 말과 함께 일으켜 세웠다.


중국인들은 술 잘 먹지 않니? 라는 나의 편견이 정말 편견이었음을 알리듯 얼굴이 불콰해진 무원이가 민망해하며 뭐? 라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2등석을 지나 3등석으로의 여행.


뒤에 더 있지만, 심쿵은 이정도로 충분!


숨막히게 귀여운 아기도 만나고, 무원이에게 수도꼭지 사용법을 알려주기까지 한 3등석 칸으로의 착륙이 성공했고, 내 맞은편 아줌마는 발그스레 해진 내 얼굴을 보며 놀랐다.

어깨를 으쓱 한 후 술기운에 취해 잠이 들었다.

이렇게 꽉찬 시베리아횡단열차에서의 3일째도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