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5-19, Владивосто́к 2일차
한국에선 잠을 못자서 문제였던 내가
전날 피곤하긴 했는가보다
꿈도 기억 나지 않을 만큼 푹 자버렸고, 그 덕분에 잠시간 멍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감각은 너무 오랜만이었고 일어나기 싫어서 뒹굴거리다 보니 침대에서 늦게 나왔다.
오늘의 할 일은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아무것도 미리 가봐야겠다 하고 정해놓고 온 것이 한 개도 없었다.
이제까지의 여행이 시간단위로, 분단위로 쪼개어 어딜 간 다음 어디서 밥을 먹고 몇 번 버스를 타고 어디로 이동한다까지 정해놓은 나만의 패키지 투어 같은 여행이었다면, 이번 여행은 정말 자유여행을 하고싶었다.
매번 내가 만든 패키지 투어로는 아침 아홉시에 숙소에서 나왔지만, 이번엔 아침아홉시에 침대에서 일어나서 늑장 부리고 나가자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아침을 먹었다.
2019년 5월 14일의 블라디보스톡 아침 날씨는 흐렸다
어제에 이어, 반드시 뭔가 하나는 사 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즈바호스텔에서 가까워서 가장 먼저 가보자 한 곳은 해양공원.
이 해양공원 끝에 가면 괜찮은 음식점이 있다 하여 왔는데, 해양공원은 그다지 볼 것은 없었다.
다만 기억에 남는것은 전도사이다.
해양공원의 벤치에 앉아있다가 음식점을 가기 위해 일어났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한국인이에요?”
라는 소리에 돌아본 그곳엔 러시아 여성분이 있었다.
꽤 유창한 발음에 당황하여 그렇다 답하였더니,
“제가 한국이 너무 좋아서 한국어를 배우는 중인데 제가 쓴 글씨 한번 봐주시겠어요?”
“(적잖이 당황) 네네 봐드릴께요”
......
당황스러웠다.
내가 머나먼 타지에서 처음 길에서 만난 사람과 말을 섞었는데 그게 전도사일줄은...?
심지어 잘썼다...
그리고 앞면도 예뻤다
당황해서 아하...네에...잘쓰셨네요 하고 웃어주자 신기하게 눈치는 좋았던 러시아분은 혼란스러움과 쓸데없이 잘 쓴 한국어 엽서를 주고 사라졌고, 이 황당한 상황에 배가 더 고파진 나는 그냥 식당에 가서 밥을 먹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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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갔던 음식점은 “zeytun Restaurant”
해양공원 주변에는 한국인에게 유명한 주마 레스토랑이 있지만 한국인이 싫어서 해외로 도망친 나는 최대한 한국인을 피해다녔다.
남들이 들으면 이상하지만, 나는 해외에 나오면 최대한 한국인들을 피해다닌다. 그들이 먼저 다가오면, 혹은 그들에게 내가 뭔가 필요해진다면, 내가 알려줄 정보가 있다면 먼저 다가가는것은 얼마든지 괜찮지만 일부러 그들과 소통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내가 해외에서 마주한 한국인들 중 즐거운 기억이 많이 없어서 인 것 같다.
블라디보스톡에서도, 전날 클로버마트 구경을 갔을 때, 기념용 보드카를 뭘 사갈까 고민하는 나에게 한국에서 온 중년층 무리가 혼자 놀러왔냐, 방학 아닌데 휴학했냐며 물어봤고 3년간 일하다 퇴사해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탄다는 나의 말에 그들은 젊은 애들은 버텨볼 생각을 않는다며 이제 만난지 30초 된 내게 인생강론을 펼쳤다.
그 덕분일까, 나는 여행하는 내내 한국인을 최대한 열심히 피했고, 가급적 그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한국인들사이에 있으면 자꾸 눈치보게 되는 나를 보며 내가 스스로 너무 속상했다.
그래서 조금 일부러, 한국인이 간다는 맛이 보장된 레스토랑이 아닌 다른 해양공원의 레스토랑은 없을까 검색한 결과 발견한 곳으로 결정했다.
내가 시킨건 샤슬릭과 하치푸리.
처음 먹어본 러시아 음식이었는데 느낀 초면에 느낀 평가는
"정말 기름지고, 정말 야채가 없고, 살이 찔 것 같은 음식이구나" 였다.
작년에 쿠바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쿠바 사람들이 전부 배가 나와 있어 신기했다. 나만 느낀 것은 아니었던지, 왜 다들 배가 나왔을까에 대해 같이 간 일행들과 잠시 스몰토크를 나눈 적 있었고 그에 대해 우리가 내린 결론은
“그렇게 짜게 먹으면 누구라도 배가 나온다” 였는데 러시아에서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기름지고 살이 찔것 같은 밀가루 덩어리를 먹고 지내며 야채가 한 개도 없는데 살이 찌지 않을리가!
갑자기 러시아 사람들 평균 수명이 65세라고 했던 기사가 생각 났고 그 기사가 수긍이 갔다.
음식이 너무 기름지다는 것 외에 러시아 음식을 맛보기엔 좋은 장소였고, 해양공원의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 이기에 다시 재방문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물론, 다시 블라디에 간다면.
신기하게도 밥을 먹다보니 아침에는 그렇게 흐렸던 날이 다시 쨍쨍해졌다.
그래서 해양공원의 바다도 반짝거리기에 부른배를 꺼뜨릴겸, 해양공원의 해안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5월 14일은 화요일이라 그런지, 낮시간에는 사람이 그다지 없었고 햇볕과 나 뿐이었다. 볼 것이 없다는 점에서 불만을 표하다 이번 여행은 그냥 내 발이 닿는대로 돌아다니고, 뭔가를 채우러 온 것이 아닌 비우러 온 여행이라는걸 다시금 상기시키며 그냥 되는대로 걷다가 나도 모르는 새 어떤 아저씨의 인생샷을 찍어준 것 같다.
사람의 습관은 무시못하는게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는 꽉 찬 일정의 여행을 하다 하루아침에 느긋한 여행을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자꾸만 자꾸만, 안그런다 해도 마음이 조급해졌다.
조급해 지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굼 백화점을 가다 혁명광장에 잠시 들렀다.
혁명광장의 뜻은 사회혁명가들을 기리기 위한 광장으로, 1930년대에는 고려인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집합 시켰던 광장이라고도 한다는데, 사회과학대학을 나왔지만 사회학은 모르고, 사회주의 대표국들 왠만한 곳은 다 갔음에도 사회주의자는 마르크스뿐이 모르는 내게 러시아 곳곳에 있는 사회주의자들의 석상은 흥미롭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혁명광장 한켠에는 대성당이 공사중이었고 가까이 가 보니 공사중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는데, 지금 다시 가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그렇게 혁명광장을 지나 도착한 굼 백화점.
굼 백화점은 러시아 공영 백화점으로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굼 백화점은 빈 상가도 많았고 구경할 거리가 없었지만, 모스크바에서 만난 굼 백화점은 역시 수도인가 싶을 만큼 화려했다.
하지만 그걸 알 턱이 없는 5월 14일의 나는 굼 백화점을 처음 만나 실망했다.
국영이라 그런지, 상가 곳곳이 비어있고, 가장 번화한 매장은 자라매장.
러시아를 여행하며 느낀 점은 러시아 사람들은 자라와 H&M을 참 좋아한다.
애지간한 쇼핑몰에 두 매장 중 하나는 반드시 입점해 있기 때문이고, 가격도 한국에 비하면 훨씬 양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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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의 굼 백화점에서 추천하는 장소는 상점가 블록이 아닌 그 건너편에 있는 편집샵과 꽃집이 있는 블록이다.
딱딱한 러시아인들에 대한 이미지와 달리 내부가 상당히 따스하고 트렌디하게 꾸며져 있어 잠시 구경한 후 근처에 있다는 독수리전망대를 향했다.
블라디보스톡은 덩어리는 크지만, 관광객이 볼만한 관광지는 전부 한 곳에 몰려있고 그 간격이 넓지 않아 그냥그냥 걸어다닐 만 했다.
다른 여행 갔다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독수리 전망대가 조금 멀다곤 하지만 워낙에 걷는걸 좋아하는 나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걸어다니며 그들의 삶의 순간을 내가 구경하는 것이 퍽 재밌었더랬다.
게다가 블라디보스톡만 와도 아시아와는 다른 느낌의 건물들이 많은데, 그걸 구경하는 재미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또 블라디보스톡이 항구, 해안도시라 그런지 조금만 높이 올라가도 해안이 보이는 것도 좋았다.
예전에도 혼자 다니는걸 좋아하긴 했지만, 혼자 다니며 어디 들어가는건 엄청 망설였던것 같은데 어느 순간 쭈뼛거리지도 않고 길에서 어디론가 감에 있어서 망설이지 않는 것도 대견하다 싶었다. 물론 구글맵과 함께 였지만.
독수리전망대에 와서는 푸니큘라를 타고 올라갔다.
이 푸니쿨라의 가격이 매우 파격적인데 단돈 400원이었다.
들어가며 돈을 내면 바로 거슬러주시고, 혹여나 운행시간에 가까워서 도착하면 일단 탄 후 천천히 돈을 받으러 오신다.
총 운행 시간은 30초 정도?
다 올라온 후 조금만 걸으면 독수리 전망대가 보인다
사람들은 이 조금 걷는걸 등산이라고 힘들어서 그냥 택시를 타라고 했지만 나에겐 그냥그냥 걸을만 했다.
그냥그냥 걸을만 했다지만, 이날은 독수리 전망대에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날이 흐려졌다.
이렇게까지 변화무쌍한 날씨를 보여줘야하나 싶을 정도.
독수리 전망대 끝에 가면 사람이 넘어갈 수 있는 펜스가 있는데, 짠내투어에서도 나와 유명해졌나보다. 가니 한국인들이 사진 찍으려고 서로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내가 갔을때는 어떤 젊은 부부가 있었는데 아내분이 열심히 포즈를 취하는데 남편분이 대충 찍어주고 계시길래 열심히 조언 해 드리고 나도 찍어달라고 해서 왔는데, 날이 너무 안좋아서였을까,
그냥 디스토피아 주민 1 같이 나온것 같다.
내려오는길에 너무 추워져서 근방에서 밥을 먹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푸니큘라에서 급하게 음식점을 찾아 "Gusto"에 들어갔고 매우 만족스러웠다.
우선 음식점 내부도 굼 백화점 스트리트 안에 있어 매우 예뻤을뿐만 아니라
음식도 매우 맛있었다
너무 몸이 싸늘해져서 몸을 덥힐까 해서 간단한 맥주만 마시러 들어간 김에 먹은 음식들이었는데 빵 안쪽엔 버터가 듬뿍 발려있었고 게살은 크래미 살이 아닌 정말 킹크랩에서 긁어낸 것만 같은 싱싱한 게살이었다.
그 위에 해바라기씨가 뿌려져 있어 부드러움과 톡톡씹히는 식감까지 하나도 놓친게 없는 음식이었다.
다시 블라디를 방문한다면 먹을 용의가 넘친다!
아무래도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인 만큼 가격이 조금 있었지만, 너무 만족스러워 팁을 남기고 싶어 일부러 돈을 더 많이 줬는데도 거스름돈을 주길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그냥 숙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