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개념이 변화하기에 우리는 슬픔 속에서도 삶을 이어갈 수 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부모님이 일군 ‘가족’이라는 집단에 속하게 된다. 딸 혹은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에 속하게 되어,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란다. 무상으로 제공되는 의식주는 덤이다. 혼자서는 먹지도 싸지도 걷지도 못하는 의존적 존재로 태어났으나, 금세 자라서 개인의 독립적 삶을 만들어 가는 성인이 된다. 그리고 일정 나이가 되면 본인과 평생을 함께할 짝을 만나게 되고, 그 인생의 동반자와 함께 ‘가족’을 만들게 된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랬듯이.
어머니, 아버지가 주도하고 나와 내 형제가 구성원으로 있던 ‘가족’이라는 개념과 나와 내 짝이 주도하여 만드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공존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나의 부모님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는 그 순간이 바로 이때이다. 가족이라는 개념을 생각했을 때, 내가 속해 있는 두 집단이 동시에 떠오르게 되는데, 양쪽 집단에서 사랑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완연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식이 자라고 내가 일군 가정에 더 몰두하게 되면서, 가족이라는 개념은 무게 추를 옮기기 시작한다. 이전에 부모로부터의 가족과 내가 일군 가족 사이에 무게 추가 자리했지만,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내가 부모로 속해 있는 가족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그 기울기는 부모님과 떨어져 살수록, 왕래가 적을수록 급해지고 빨라진다. 이 사실이 퍽 슬프게 들릴 수도 있지만, 세상에 태어나 가정을 이루고 산 모든 존재들이 겪어간 일이다.
그리고 무게 추가 완전히 기우는 시기가 오는데, 나의 자식들은 성체로 성장하고, 반면에 나의 부모는 황혼기를 맞는 시점이다. 가족을 생각했을 때, 내 반려자와 자식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떠오르게 되고 이전에 내가 속했던 가족이라는 정의는 잊혀가는 시기이다. 삶에 갖는 의지나 사랑은 이미 내가 이룬 가족으로 완전히 옮겨졌다.
인간은 모두 다 늙고,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자식과 부모는 생의 일정 부분만을 공유하고 죽음 앞에서 이별할 수밖에 없다. 나와 나의 부모도 예외는 아니다. 내게 세상의 빛을 보게 해준 사람,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나를 먹이고 가르친 친애하는 이 사람은 요행이 일지 않는 이상 내게 죽음을 보여줄 것이다. 지금은 그 생각만으로도 손이 저리고 목이 막히며, 아득하다. 하지만 피할 순 없을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쨌거나 인생에 한 번은 찾아올 정해진 비애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 아프다 못해 저린 이별의 슬픔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부모와의 영원한 이별을 딛고 어떻게 다시 밥숟가락을 들고 행복을 좇을 수 있는지, 어떻게 이 거대한 슬픔 속에서도 삶은 열정적으로 이어지고 인류는 번영을 할 수 있었는지 나는 궁금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이 기억난다. 나는 6살 무렵이었고, 주말이었으며, 새벽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고 있던 나를 깨워 차에 태웠고, 큰 외삼촌이 계시는 충주로 차를 몰았다.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으나, 두 분 얼굴에 담긴 수심으로 짐작했었다. 특히 어머니 얼굴에 드리운. 나는 그날 처음으로 어머니가 서럽게 우는 모습을 봤다. 그건 내가 치과에서 보였던 눈물과는 격이 다른 것으로, 울음으로도 도무지 소화할 수 없을 것 같은 비통함이었다. 나는 어려서 잘 인식하지 못했다. 외할머니가 우리 어머니의 엄마였다는 것을. 나에게 엄마가 있듯이, 어머니에게도 나와 같은 결의 애정을 느끼는 엄마가 있고, 그녀가 오늘 떠나갔다는 것을. 어머니가 외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는 기억이 전혀 없는 걸로 봐서, 나는 확실히 엄마의 엄마가 외할머니라는 점을 이해는 했으나 공감은 못 했었다.
외할머니 장례를 치르고 나서도 어머니의 슬픔은 지속됐고 가끔 눈물도 보이셨다. 하지만 그 슬픔 속에서도 어머니는 가정을 이끌었고, 나와 누나를 먹이고 키웠다. 그녀는 기꺼이 행복을 추구했고, 그녀가 일군 가정이 평화와 화목을 누릴 수 있게끔 최선을 다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어머니에게 ‘가족’의 개념이 이미 바뀌었기에 가능한 일이지 않았을까 싶다. 삶에 대한 애착과 행복의 뿌리가 그녀가 딸이라는 이름으로 속해 있던 가족이 아닌, 나의 아버지와 함께 이룬 가족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마무시한 슬픔 속에서도 삶을 이끌어 올 수 있지 않았을까. 지구를 살아간 모든 인류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의도였든 아니든 가족의 개념 변화가 이 모든 걸 가능케했던 게 아닐까 싶다.
아직 다른 가족이 없는 내 입장에서,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생각을 해보면 도무지 삶을 지탱할 자신이 없다. 지금 내가 인생에 가지고 있는 열정과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는 의지가 그녀 없이도 지금과 같을 것이라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 이유 때문에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은 아니겠으나, 어쨌건 내가 또 다른 가족을 만들어야 이별의 슬픔을 헤치고 다시 삶의 방향키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자식을 낳고 가정을 이루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가족의 무게 추가 내가 만든 가정으로 옮겨가야 우리는 또 후대를 약속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여기에 인류가 계속해서 존속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징그러운 생각을 해본다.
나의 조부모가 그랬고, 나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도 가정을 이루며, 부모가 만든 가족의 해체를 경험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목이 메이기도 하고 적나라함에 몸서리가 처지기도 하지만, 유한한 시간만을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변화에 순응하며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사랑하기로 했다. 일단은 지금 이 가족의 구성원으로 내 부모와 형제에게 최선의 사랑을 주기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