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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수첩

내일은 새로운 수첩을 살 계획이다.

by 키수킴


해군에서 배를 타며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다. 알려준 것을 잊었을 때, 선임들에게 받을 핀잔이 두려워 적기 시작했지만, 그들에게 핀잔이 아닌 정을 느끼고 있을 때도 나는 메모를 하고 있었다. 다만 그 주에 해야 할 속칭 ‘막내 일’ 같은 것들이 아닌, 전역 후 하고 싶은 것들과 뜻깊었던 하루하루를 적고 있다는 차이점은 있었다.


전역하며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근사한 수첩을 산 것이었다. 그것이 마치 나의 꽤 괜찮은 시작을 보장해 줄 것만 같았다. 23살의 나는 조그맣고 하얀 네모 안에 나의 이야기를 적어 나갔다. 수첩은 내 설렘도 낯섦도 그리고 비겁함까지도 모두 받아줬다. 나는 수첩을 펼 때 가장 솔직했다.


무더운 8월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지고 다니던 수첩을 잃어버렸다. 스케줄을 기록하고 심심치 않게 일기도 적었기에 아쉬웠다. 세상에 알려지면 큰일이 날 법한 어마어마한 비밀 따위는 없었지만,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내 마음을 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두렵고 아쉬운 마음으로 또 다른 수첩을 샀다. 그리고 그날 아침, 해야 할 일을 적었다. 나의 기록들을 잃어버린 데 대한 아쉬움 역시도 새 수첩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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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수첩에 새로운 일들이 적혀 나갔다. 나는 그곳에 나의 흔적들을 남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오늘은 새롭게 산 그 수첩의 마지막 장에 하루를 정리했다. 지난밤 수화기 너머로 결별 소식을 전하며 한숨을 푹푹 쉬던 친구의 이야기도 남겼다. 끝이 주는 아쉬운 마음에 수첩을 뒤집어 첫 장을 확인했다. 8월 3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이어진 약 100일간의 이야기가 수첩에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오늘로써 덮였다. 아쉬움과 두려움으로 적었던 첫 장이 오늘은 다른 아쉬움과 두려움으로 읽혔다. 그것은 또 하나의 인생의 장을 끝낸 아쉬움이자 또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할 두려움이었다.


적은 메모들을 살폈다. 적은 일기들을 다시 읽었고, 느꼈던 감정들을 다시 느꼈다. 그 안에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과 그들이 내게 주었던 인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SNS의 사진을 정리하는 것처럼 혹은 핸드폰 사진첩에 있는 사진들을 정리하는 것처럼 한 장 한 장 애틋함으로 넘겼다. 추억은 눈부셨고, 지키지 못했던 약속들은 못내 아쉬웠다.


이제는 헌 수첩이 된 그곳에 근 100일간 서사를 그렸던 나는 그 시간만큼 성장한 것인지 퇴화한 것인지 아니면 그때와 똑같은 지점에 서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행복함을 남길 땐 행복했고, 슬픔을 남길 땐 슬펐을 뿐이다. 그 슬픔과 행복을 곱씹으며, 추워지는 창밖 날씨와는 다르게 마음은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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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감는 순간까지 지속하고 싶은 일 중 하나는 기록하는 일이다. 그날그날 수첩 위에 나의 하루를 담고 싶다. 내게 허락된 모든 순간과 그 순간에 깃든 감정과 생각을 남기고 싶다. 언제까지나 추억 속의 나를 읽으며, 오늘의 나로 살아가고 싶다.


내일 아침 새 수첩을 살 생각이다. 어떤 디자인의 수첩을 살지 어느 정도 크기의 수첩을 살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그저 적고, 읽고 그리고 넘기기 편하면 장땡일 것이다. 나는 첫 장에 11월 17일을 적을 것이다. 내일 해야 할 일도 적을 것이며, 무언가 끄적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투박하게 끄적일 것이다. 약속을 기록할 것이고, 만나는 사람들의 느낌을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처럼 언젠가 또 마지막 장을 덮으며 첫 장을 열어보겠지. 그때 나는 오늘처럼 슬퍼하고 또 기뻐하며 엉덩이에 털이 날 것을 걱정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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