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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군 생활 23개월의 모든 것.
해군 601기

내게 어른이 된다는 건_해군 군 생활 23개월의 모든 것

by 키수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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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 익숙해진 겨울을 벗어나 봄의 기운이 파릇파릇하던 3월. 나는 익숙한 사람들과 함께 익숙하지 않은 어느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경상남도 진해.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먹고, 자라고 배운 내게 진해는 후무하진 않겠지만, 일단은 전무한 곳이었다. 모호함에서 기인한 두려움과 궁금증은 해군의 요람이자 한두 달 뒤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온통 하얀 물결일 진해를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곳으로 만들고 있었다. 화이트 데이이자 내 생일인 3월 14일 하고도 3일이나 지난날이었다.


입대 당일에 제천에서 진해까지 단번에 이동하는 것은 무리였기에, 때마침 부산에서 근무하고 계시던 이모부가 계셔 하루 신세를 졌다. 부산까지 내려가는 동안에, 나는 아무 감정이 없었던 것 같다. 말 그대로 무의 감정이었다. 부산에 도착하여 이모부를 만났고, 저녁을 먹기 위해 광안리 인근의 횟집으로 갔다. 거사(?)를 앞두고 있는 나였지만, 식욕은 이를 모르는 눈치였다. 평소보다 많은 양을 먹었다. 그리고 배가 부르고 나서야 이곳이 광안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기를 채우는 동안 내게 철저히 외면받았던 광안리가 그제야 눈에 들어온 것이다. "청승 떨지 마"라는 사촌 형의 핀잔을 뒤로한 채 비장하게 광안리를 밟았다. 당시에는 때 이른 봄비가 부산을 적시고 있어 분위기는 제법 그럴싸했다. 누군가 나를 본다면 '내일 입대하는구나'라는 생각 정도는 들 만한 표정이었다고 자부한다. 저벅저벅 백사장을 걸으며 나름의 폼을 잡았다. 간간이 입대를 앞둔 친구들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들은 내게 심정을 물었고, 나는 내리고 있던 봄 비와 같은 심정을 전했다.


외출을 마치고 돌아와 잠자리에 들기 전 샤워를 했다. 내 몸의 때를 씻어내며, 나를 억척스럽게 감싸고 있는 이 이름 모를 불편한 감정마저도 깡그리 씻어내고 싶었지만, 타일에 떨어져 수챗구멍으로 향하는 것은 비눗물뿐이었다. 걱정이 많아 쉽사리 잠들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금세 심연과도 같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어쩌면 그렇게 잠들어 내일을 맞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입대 당일


하지만 달은 지고 해는 뜨는 법. 3월 18일은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밝아왔다. 입대 당일 날씨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청명한 하늘에 태양은 호사스러웠다. 그래서 그 빛을 받아내고 있던 내 어깨는 더 처량해 보였던 것도 같다. 짧게 잘린 내 머리칼을 기분 좋게 쓰다듬는 실바람은 여기가 대한민국인지 이탈리아인지 의심케 하기에 충분했다. 입대하기 좋은 날이었다.


부산에서 진해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대략 1시간 정도가 걸렸다. 진해에 도착하고 얼마 뒤, ‘교육사령부’라 당당하게 적혀 있는 표지판을 지났다. 표지판을 지나자, 거리를 감성적으로 수놓고 있던 수많은 빡빡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키 큰 빡빡이, 안경 쓴 빡빡이, 잘생긴 빡빡이 등등 그리고 나까지 죄다 빡빡이었다. 나는 나와 같은 머리의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과 감정으로 표지판을 지났을까 궁금했다.


시간에 맞춰 교육사령부 후문을 지나 집결장소로 향했다. 사령부 내부는 흡사 대학 캠퍼스 같았다. 정갈하고 말끔하게 지어진 건물들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 밝은 색으로 채색된 조형물 그리고 푸른 잔디밭을 지날 때,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기분도 느꼈다. 다만 지금쯤 대학 캠퍼스에 만연할 설렘과 발산하는 기운들이 이곳에는 조금 결여돼 있을 뿐이었다.


연병장 변죽에 앉아 입영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작 시간이 가까워오자 덤덤해지는 것도 같았다. 그건 체념의 다른 형태였는지 모른다. 기다리는 동안 의장대의 행사를 관람하였다. 그들의 큰 키를 부러워하는 한편, 농을 칠 생각으로 고개를 돌려 가족을 봤다. 그들의 표정 앞에서 나는 농을 던질 수 없었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입영장의 슬픈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은 본인들보다는 그들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가족들과 친구들이라는 생각 말이다. 흔들리는 눈빛의 어머니들과 담배만 연신 태우는 아버지들 금방이라는 울어버린 것 같은 여자 친구들이 만들어 내는 그날 그 장소의 애절한 분위기는 제 아무리 호연한 사람이라도 숙연해지기 충분했다.


입영대상자들은 연병장에 집합하라는 소리가 평화롭던 하늘에 울려 퍼졌다. 나는 내 가족들에게 웃어 보이며 황급히 돌아섰다. 이미 은은하게 눈물을 보이시는 어머니와 내게 걱정의 눈빛을 보내는 친척들의 표정 앞에서, 내 눈이 젖어갔고, 나는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특히 내 어머니께. 조만간 만나지 못할 가족들의 마지막 모습을 그런 슬픈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연병장에 옹기종기 모여 지역별로 줄을 섰다. 역시나 경상도와 부산 친구들이 많았고, 내가 서 있던 충청도 열은 휑했다. 저마다 한 손에는 종이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제 각각의 사연들이 들었으리라. 식순은 잘 기억나질 않지만, 애국가를 부르던 장면은 아주 선명하게 기억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는 것이 그리도 애석한 일이었을까. 내 주위에 있던 장골의 친구 몇 명이 아주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떨림은 나비의 날갯짓이 되었다. 이내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삽시간이었다. 울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고 다짐하던 내가 그들의 떨림에 동조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건. 지금 돌아보면 부끄럽지만 다시 그 순간에 놓인다면 울지 않을 수 있다는 장담은 못하겠다. 장병 가족 대표로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들을 향한 구구절절한 편지를 읽은 순간에는 나는 흐느끼기보다는 엉엉 울고 있었으니깐.


생각과 다르게 입영식이 끝나고 신병교육대로 향하는 길에 가족들과 다시 조우할 수 있었다. 좀 전까지의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였기에 내 얼굴에는 눈물 자욱이 진했다.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얼마 걷지 않아, 검은 철로 탄탄하게 만들어진 문에 도착했다. 정말로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다. 나는 이대로 약한 모습만을 보여줘서는 안 되겠다는 김해 김씨 집안 장손 다운 생각이 들어 ‘찡끗’ 웃으며 걱정 말라는 말을 남기고 대열에 합류했다. 근 1분, 그러니깐 더 이상 가족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걸으며 수많은 다짐들을 했다. 하지만 곧 부질없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빨간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들과 대면한 순간, 다짐 같은 건 사치였다는 걸 나는 알게 됐다.


새로운 시작 훈련병


우리의 교육과 훈련을 담당한 그들은 모두 부사관들이었고, 우리는 그들을 교관이라 불렀다. 입대 전 해군에 먼저 입대했던 고향 친구는 말하길, 교관들은 동네형처럼 친근하고 격 없이 대해주며, 유쾌한 사람들이라 했다. 나는 그 녀석에게 도대체 어느 동네 형을 말하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울퉁불퉁한 근육과 각 잡힌 동작으로 무장한 그들은 21년간 '키수킴'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내게 '훈병'이라는 낯선 이름을 주었고 전국 팔도에서 모인 XY 염색체들에게 해상병 601기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주었다.


군대는 여러모로 날 놀라게 했다. 그중 첫 번째가 호구(虎口)처럼 모여 있는 우리들을 대상으로 호구조사(戶口調査)를 실시할 때였다. 강당에 다 같이 모여 있는 우리들에게 그들이 물었다. 정, 재계 인사나 군 관련 인사 혹은 CEO 및 대기업 임원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애당초 그런 귀한 인물들과 연이 없었던 나이기에, 내 엉덩이는 의자에 계속 붙어 있었다. 앞으로 나간 대단한(?) 친구들은 특별해 보이는 종이에 이름을 적는 것 같았다. 그들은 말 그대로 특별한이었다. 그리고 학력 및 외국어 구사자에 대한 조사가 이어졌다. 세계 명문 대학 출신들도 많았고, 국내 유수 대학에 재학 중인 친구들도 수두룩했다. 단지 외국어를 국내에서 간접적으로 배운 사람들과는 비할 수도 없게 해외 거주 ~년의 사람들도 많았다. 어느 것 하나 넘볼 수 없었던 나는 작아지고 또 작아지고 있었다. 군대는 날것 그대로의 몸으로 들어와 날것 그대로의 몸으로 떠나는 '공수래공수거'의 미덕이 전적으로 실현되는 곳이라 생각했는데, 우리가 사회에서 영유했던 배경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벗어던진 옷가지들처럼 쉬이 내팽개쳐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교관들이 민간인을 군인으로 만든다며 우리들에게 허락한 몇 안되는 말투와 행동들은 걸대로 걸어버린 내 입과 몸에 잘 붙지 않았다. 거수경례보다는 묵례가 더 빨리 반응하였고, 무의식 중에 주머니에 손을 넣어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머리도 다시 잘랐다. 아니 밀었다. 눈썹보다도 짧게. 머리를 밀고 나서야 왜 겨울철에 스님들이 필히 모자를 쓰고 다니시는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새벽에 해군가를 부를 때 머리가 너무 시렸다. 시간은 생각보다 잘 흘렀다. 정식 소대가 편성되고 편지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입대 전 많은 사람들이 편지를 쓰겠다고 했다. 그래서 편지가 너무 많이 와 소대장에게 혼이라도 나면 어쩌나 걱정도 하였다. 모든 것은 기우였다. 난 가족을 제외하고 총 두 명에게 편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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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편지와 훈련소 수료


훈련소의 밤은 언제나 적막과 함께 찾아왔다. 적막 사이로 동기들의 코 고는 소리와 이 가는 소리는 조화를 이루었다. 나는 그 칠흑 같은 밤에 꾹꾹 눌러 그려보는 가족들의 얼굴과 친구들의 얼굴로 적막을 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적막을 깨고, 어머니에게 첫 편지가 왔다.


취침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 화장실로 조용히 향했다. 한 쪽 주머니에 어머니의 편지를 넣은 채였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 편지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떨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아들아'로 시작하여 '너무 보고 싶구나'로 끝나는 10줄이 채 안되던 짧은 편지를 읽는 동안, 나는 한없이 그리고 원 없이 울었다. 울고 울다가 편지가 눈물에 젖을까 애써 눈물을 훔치기도 했고, 문장마다 진하게 새겨져 있을 어머니의 마음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 한 문장, 한 단어에 온 마음을 다해 천천히 읽었다. 21년간 내 곁에 한결같이 있어준 어머니의 사랑 앞에서 나는 눈물로써 모든 걸 게워내고 있었다. 비록 나는 진해 어느 화장실에 홀로 앉아 있었지만, 내 사랑은 이미 강을 건너 산을 넘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편지를 읽고 있었던 게 아니라, 편지를 느끼고 있었다.


그날 이후 마음이 편해졌다. 회한과 비감, 후회, 상실감 같은 것들이 눈물에 완전히 게워진 듯했다. 그리고 나는 훈련소에 빠르게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야 내 주위를 둘러보고 그곳을 즐길 수 있었다. 사실 훈련은 크게 힘들지 않았다. 화생방에서 혼절할 뻔하고 이함대에 올라 오들오들 떨었지만, 육체적으로 크게 힘들진 않았다. 오히려 수험생 시절이 그에 곱절은 힘들었다는 생각을 훈련받는 동안 왕왕하였다. 간간이 먹던 초코파이는 정말 맛있었다. 왜 그것이 ‘Since 1974’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사랑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 위에 시간이 쌓여 화사하게 핀 벚꽃으로 건곤일색이던 따뜻한 봄날, 순백의 병정모를 하늘에 내던지며 해상병 601기는 기초군사교육단을 수료했다.


이어진 후반기 교육은 내 군 생활 중 가장 여유롭던 시간이었다. 해군의 꽃 갑판병으로서 전투병과 학교에 입교하여 함정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 및 결색술을 배웠다. 나는 5명의 친구들과 같은 침실을 썼는데, 우리들은 죽이 잘 맞았다. 우리들이 매일 밤 피워내는 이야기 꽃은 환하게 만개하여 우리들의 밤을 환하게 비추어 주었다. 그 시간들이 너무도 황홀하여 곧 자대로 향한다는 사실도 까마득하게 잊었던 것 같다. 게 눈 감추듯 4주가 흘렀고, 우리들은 각자의 자대로 뿔뿔이 흩어졌다. 언젠가 다시 만나 제주도로 함께 여행 가자는 약속만을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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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해군 라이프 시작과 함께 찾아온 고난


2013년 5월 21일 나를 포함한 4명의 이병들은 진해기지사령부 어느 한 부두에 다리가 땅에 박힌 허수아비처럼 서 있었다. 저 멀리 크고 검은 것이 보였다. 저 멀리서 우리들을 향해 내달리듯 입항하고 있는 검은 군함이었다. 21개월 후 제대하던 그날까지 나의 침실, 화장실, 샤워장, 독서실, 식당, 작업장, 헬스장, 노래방이었던 함정과의 첫 대면이었다. 우리 부서 선임들은 총 11명이었다. 맞선임은 한 기수 위였지만, 다른 선임들은 까마득하게 높았다.


여러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내가 만들어 놓은 선임의 표본은 영화 '용서받지 못 한자'의 유태정(하정우 역)이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저 남해바다 어딘가 떨어졌다. 선임들은 모두 따뜻했고 무엇보다 융통성이 넘쳤다. 물론 성향이 제각각 이어서 모두를 파악하는 것은 조금 힘든 일이었지만. 하지만 그런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나에게 짙게 드리우고 있던 암운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함정에 온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축구를 하자는 선임들의 말에 용감하게 뛰쳐나갔다. 그것은 만용이었다. 원래 운동을 좋아하고, 또 오랜만에 하는 축구여서 마음이 들떴다. 들뜬 마음은 내 발목도 들뜨게 했다. 발목을 접질린 것이다. 고난은 그렇게 시작됐다. 별거 아니라 생각했지만 다음날 걸을 수가 없었고, 군병원에서 깁스를 하고 돌아왔다. 신병이 다친 것만으로도 큰 문제였는데, 가장 바쁜 부서의 막내라는 점, 그리고 곧 훈련을 앞두고 있다는 점이 여기에 추가됐을 때, 내가 견뎌야 할 상처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하나하나 배워가며 일에 익숙해지고, 우리 부서뿐만 아니라 타 부서 선임들과도 말을 섞으며 바쁘게 지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깁스라니. 간부들은 나를 침실에 무한정 대기시켰다. 그들에게는 최선의 배려였겠지만, 이것은 나를 믿을 수 없이 힘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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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스를 한 채로 보내야 한 그 시간들은 나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시간들이었음을 고백한다. 선임들은 나를 많이 배려해 주었지만, 피로에 지친 그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스스로 죽어갔다. 그들이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그들의 무고한 숨결과 눈빛들은 내게로 와 원망과 책망이 되어 나를 물어뜯었다. 그때 나는 그만큼 약해져 있었다. 피해 의식과 낯선 곳에서 오는 불안감 때문에 정신적으로 심히 흔들렸다. 그렇게 쌓여 가는 스트레스는 니체의 말처럼 외부로 발설되지 못한 채 내부에서 곪아 터지기 시작하였다. 학창 시절 이후로는 작별한 줄 알았던 여드름들이 얼굴을 덮기 시작했고, 활동량이 현저히 줄어버려 살이 찌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넓은 이마는 조금 더 넓어진 것도 같았다. 높은 머리와 낮은 가슴을 지향하며 살아온 내 삶이었는데, 머리는 저 지하 어딘가에 처박혔고 가슴은 요동을 쳤다. 거울을 통해 마주한 나는 찌그러져 가고 있었다. 바닥이 어디인 줄 모르고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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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도 서도 가시 방석이던 그 시절을 어떻게든 지나, 지금 이렇게 글로 옮길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국방부의 시계는 아무리 아프고 쓰라려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내게도 유능한 두 명의 후임이 생겼을 즈음, 발목은 거의 다 나아 걸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하나둘씩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청락 작업과 도장작업이 주였다. 그때를 시작으로 맞선임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임들이 제대를 하던 2014년 초까지 정말 쉼 없이 살았음을 자부한다. 신발 밑창이 녹아내리는 여름, 황량한 바람 불던 가을, 칼바람 부는 겨울 일만 해서 일병이라는 계급답게 구르고 굴렀다. 그래야만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그래야만 내가 범해버린 오욕과 멍에를 씻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몸이 피곤해질수록 정신은 반대로 맑아져 갔다. 그 기간 동안 선임들과 이리저리 부대끼며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느끼고 정을 나누었다. 그들이 전역하던 날에는 섭섭함을 느끼기도 했었다.



선임으로 보내는 군대와 휴가.


나의 선임들이 빠진 자리에는 다다한 후임들이 채워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601기 수료식을 축복했던 벚꽃이 1년의 시간을 돌아, 다시 그 자리에 움트기 시작했을 땐, 밥을 먹고 식판을 닦는 일병이 아닌 점심 뒤, 낮잠을 즐길 수 있고, '잘 못 들었습니다'를 누구보다 빨리 말할 수 있는 상병이 돼 있었다.


군대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목사를 꿈꾸던 사람, 좋은 직장에서 일하다가 온 사람, 나이 많은 사람, 이상한 사람, 전직 축구선수, 뮤지컬 배우, 태권도 선수, 고기쟁이, 꿈 많은 친구들, 순수한 사람, 병신 같은 새끼들 등등 다다한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배경에 놓여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온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뛰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건 내 23개월의 군 생활이 얻어낸 최고의 성과가 아닌가 싶다. 함께 울고 웃으며, ‘한 배를 탄다’는 말을 나는 그때 배웠다.


가물에 콩 나듯 휴가는 찾아왔다. 휴가는 언제나 나에게 새로운 자극제가 되었고, 사색의 거리를 늘려 주었다. 일주일간 휴가를 가 보고 듣고 먹고 느꼈던 것들은 어스름한 새벽 당직을 서고 있으면, 파도 소리와 함께 찾아왔고, 수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해가 질 때, 찾아왔다. 나는 사색으로 이들을 맞이했고, 이 과정은 내게 살이 되고 뼈가 됐다. 나에게도 깊이라는 게 생기는 것 같았다.


휴가는 특히 내게 주위 사람들을 둘러볼 기회를 주었다. 가까웠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기가 왠지 불편할 때, 반대로 형식의 친구만을 표방한 관계라 생각했던 누군가가 진심으로 날 위해 준다고 느꼈을 때, 그때마다 번뜩이던 무언가는 지금껏 내가 걸어보지 못한 새로운 생각의 길들을 열어주었다. 머리로써 이해하던 친구라는 개념을 가슴으로 옮겨 놓는 작업은 물리적으로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고, 휴가라는 짧은 시간으로 충분하였다.


언젠가 나는 군대에 감으로써 내가 사회에서 가지고 있던 많은 문제와 갈등들이 조용히 불식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보기 좋게 틀렸다. 군대는 다만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을 뿐, 내가 키워낸 문제들은 내게 익숙한 곳, 내가 알았던 누군가의 뒤에 숨어 입을 쩍 벌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전역이라는 막연했던 것을 구체적으로 그려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것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나에게 덤벼들었다. 상병이 된 이후, 나를 쫓아다니며 괴롭혔던 고민들은 대부분 사회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돌아갈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다시 내 문제들과 마주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편해진 생활과 전역


선임보다 후임이 훨씬 많아진 이후로는 생활이 편해졌다. 근육 자라라고 먹은 단백질 보충제가 근육 보다는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의 성장만을 촉진시켜 마음이 좀 쓰이고, 이따금씩 간부들의 횡포에 힘들기도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상병이 된 이후의 시간들은 거의 대부분 책을 읽고 운동하고 가끔 친구들에게 전화하는 것으로 소일하며 보냈다. 그리고 이제는 나보다 내 후임들이 훈련에 더 능숙하고 페인트를 더 깔끔하게 칠할 수 있게 되자, 나도 전역이라는 것 앞에 서게 됐다.


입대한 지 딱 23개월이 지났을 때, 나는 제대를 하였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이력서에 '군필'이 두 글자를 적을 수 있는 자격을 얻는 데 23개월이 걸렸다. 물론 21개월 만에 해낸 친구들(육군)이 부럽기도 했지만, 설령 나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해군을 선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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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위의 친구들이나 형들이 그랬듯, 나 역시도 군대에 갔다 왔다고 해서 크게 변한 것은 없다. 아직도 매력적인 이성을 보면 실없는 생각들이 어디선가 슬금슬금 기어 나와 스스로 겸연쩍어질 때가 있고, 부모 잘 만나서 물고 있는 금 숟가락이 마치 제 자신의 재량인 것처럼 으스대는 녀석들을 보면 감기던 눈도 다시 부릅 뜨인다. 다만 한 가지 변한 것은 영세한 내 삶일지언정 이제는 애착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애인을 떠나보내고 나서 뒤늦게 후회하며, 그가 또는 그녀가 얼마나 나에게 절실한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처럼, 돌아가신 부모님의 영정사진 앞에서 살아생전 못 해드린 것들에 대해 뼈저리게 통절하는 것처럼, 간헐적으로 나마 내 삶을 잃어버린 후에야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살았던 시간들과 살아갈 시간들이 덧없이 소중한 것이라는 걸. 내가 누렸던 자유와 나와 함께 호흡했던 사람들 그리고 내가 걸어온 길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것들인지 여실히 알게 됐다. 그래서 이제는 이 소중한 것을 양 손에 꼭 쥐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아보려 한다. 내 마음이 쓰이는 대로 내 감정이 흐르는 대로 아무 저항 없이 유유히 따라가 볼 생각이다.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내 감정을 아주 솔직하게 전하며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하며 말이다. 어차피 초로인생이 아니던가. 솔직하게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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