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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사각 링 위의 권투 시합이다.

내게 어른이 된다는 건_인생은 권투 시합

by 키수킴

한 남자가 있다.

불혹의 나이 마흔. 사업 실패. 가정 불화. 자신 있게 아들 앞에 설 수도 없는 아버지. 그 모든 오욕들을 맨주먹으로 맞서는 남자. 한 때는 아시안 게임 권투 은메달 리스트. 그는 돈을 받고 사람들에게 맞아주며, 세상에 맞서고 있는 길거리 복서다. 믿는 건 맷집밖에 없는 그를 세상은 마음껏 조롱하고 비아냥거린다. 아들에게 창피하다는 말을 들은 그날, 그에게 남은 건 글러브뿐이었다. 그의 최후의 보루는 가족이다.


또 다른 남자가 있다.

지긋지긋하게 따라오는 가난. 등이 휜 채 세상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살아가는 할머니. 기우는 가세를 온몸 던져 버티는 아버지. 그는 세상이 지운 운명에 열렬하게 반항하는 청춘이다. 어느 날 그에게, 막노동을 하던 아버지의 비보가 날아든다. 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더 모질었다. 아버지에 대한 눈물이 채 마를 겨를도 없이, 그의 할머니 역시 충격으로 쓰러진다. 그는 글러브를 집어 든다. 그의 최후의 보루도 가족이다.


두 남자는 ‘신인왕전’에 출전한다. 한 남자의 마침표와 한 남자의 느낌표가 결승에서 출동한다. 물러설 수 없는 남자와 물러설 곳이 없는 남자는 작은 사각 링에서 서로를 마주한다. 내 얼굴로 날아드는 상대의 모진 인생의 주먹을 견뎌내고, 내 사연을 실은 주먹을 상대의 얼굴에 꽂는다. 선혈이 낭자하고, 두 눈은 불어 터져 앞도 제대로 볼 수 없지만, 상대를 쓰러뜨리기 전까진 절대 포기할 수 없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의 무게는 내가 버텨야 할 상대의 주먹보다 가볍다. 그렇게 두 남자의 절절한 사연이 작렬하게 맞붙는다. 영화 ‘주먹이 운다’이다.



썩 성에 차지 않은 면접을 보고 나왔다. 내쉬는 것이 숨인지 한숨인지 분간할 수 없다. 나보다 곱절은 뛰어나 보이는 지원자들이 막무가내로 미워지는 마음을 잠재울 수 없어, 창피하다. 그 위에 겹쳐지는 가족의 얼굴은 내 삶의 무게이자, 내 삶의 최후의 보루다.


사각의 면접장에서 나는 다른 지원자들과 함께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모진 길을 걸어왔는지, 각자의 방법으로 말했고, 그 길 끝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장황하게 말했다. 분을 발라 단점을 숨기고, 몸을 놀려 장점을 늘어냈다. 서로는 서로를 견제했고, 탐색했으며, 밟고 올라서려 했다. 포성 없는 전쟁과 같았고, 주먹 없는 권투시합과 같았다. 우리는 사각의 면접장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내 삶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들의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겠지. 그들의 최후의 보루도 가족이 아니었을까. 지난 면접을 회상하며, 영화 ‘주먹이 운다’를 생각하는 이유다.


인생이 때때로 잔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애절한 사연과 절절한 사연이 맞붙는 장이면서, 그중 하나의 사연의 손만 들어주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마주 선 상대를 쓰러트려야만 하는 권투 시합처럼 말이다.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향하는 나에게, 세상이 알려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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